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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로니카의 참견 Oct 27. 2021

우리는 우느라 함께 휴지를 붙들고

눈물 없이 할 수 없는 진료

 지난 9월 새로운 소장님께서 발령을 받아 부임하시면서, 7 월부터 시작된 3 개월 간의 난정 보건진료소 파견 근무가 끝났다. 하지만 천성이 오지랖이라 육아휴직으로 비어있던 교동도의 또 다른 보건진료소 파견근무를 자청하고 말았다. 내년 6월이면 정년퇴직하는 '왕고 선배'가 거의 일 년을 주 2회 파견을 다니고 있었지만 누구도 바꿔 줄 수 없었던 형편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코로나 선별 진료소며 코로나 예방 접종센터 파견으로 동료들 모두 지쳐 있는 상황이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정년퇴직이 6개월 정도 남은 선배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소소한 업무는 가능한 빼주는 것으로 예우를 해드리는 미덕이 있었지만, 일복 많은 선배를 위해 그럴 여유가 되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이미 많이 지쳤지만 함께 한 세월이 30년이 넘었다. 고향 선배요, 대학 선배이기도 한 분에 대해 그 정도 배려는 내가 해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최근 리모델링을 하여 내부 전체를 수리한 후 정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이곳을 선배가 많이 난감해하고 있었다. 친정 엄마께서 늘 내게 그러신다. '너는 네 신세 네가 볶는다'라고. 나는 그렇다.


 어쨌든 이곳 상용 보건진료소로 파견을 나오게 된 첫날부터 약 사흘에 걸쳐 약제실과 진료실 그리고 창고를 정리하고 치우고 오래된 폐가전을 내놓아 수거해 가도록 하는 등의 일을 하면서 진료도 하고 이런저런 업무를 해결하는 동안, '진짜로 이번이 마지막이다'를 열 번은 더 다짐했다. 이렇게 국가의 예산을 들여 '농어촌 의료 서비스 개선을 위한 사업'을 벌인 주체인 광역시에서 이용자 만족 조사를 한다. 세금을 낭비하지 않고 적절하게 사용했다는 것을 평가하는 도구이다. 나는 진료를 보는 틈틈이 만족도 조사를 위한 개인정보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오늘 첫 내소자이신 '봄'님에게 동의서에 서명을 받겠다고 하자 봄님은 망설이신다. 들어오시면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훤하게 잘 고쳐 놓았다'라고 하셨던 분이 망설이시니 죄송한 마음이었다.

"하기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하기 싫은 게 아니고, 나는 사실은 글씨를 몰라요. 새엄마가 나를 학교 문턱 구경도 안 시켜줬어요. 이름만 쓸 줄 아는데 괜찮아요?"

마스크 너머로 부끄러워하시는 80세의 어머니 눈빛이 따뜻했다.

"옛날 어머니들은 다들 그러셨더라고요. 살림도 가난하고 아이들도 많으니 학교를 보내기 어려웠잖아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으로 시작되는, 이름에 '봄'자가 들어가는 80세의 어머니의 사연이 시작되었다. 새엄마의 눈을 피해 밥을 훔쳐서 잿간에 가지고 가서 몰래 먹어야 할 정도로 설움을 받으며 자랐다고 하셨다. 살림이 그렇게 어려웠던 것도 아닌데 학교 보낼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은 새엄마 때문에 집에서 시키는 일만 해야 했다. 그러다가 18살이 되었을 때 지금 사는 이 마을 19살 신랑에게 '걸어서' 시집을 왔다. 어머니가 태어난 그 마을에서 이 마을까지는 6Km가 넘는 거리이다. 자동차로야 10분 이내지만 걸어서 온다면 적잖게 먼 길이다. 좁은 비포장 먼지 길을 터덜터덜 걷는 소녀....

"다 헤진 낡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보따리도 없이 아버지 따라서 걸어서 시집을 오났시다...."

스위치를 잠글 사이도 없이 곧바로 눈물이 터졌다.


 '어리디 어린 18살 소녀가 누더기 치마저고리를 입고 한 시간을 넘게 아버지 뒤를 따라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터덜터덜 먼지 나는 길을 걸어서 걸어서 시집을 왔다. 한 살 차이 신랑과 마당에 멍석을 깔고 물 한 그릇 떠놓고 혼례를 올리는 장면을 상상으로 떠올리며 어찌 눈물이 나지 않으랴'


 새 신랑은 14살부터 남의 집 머슴을 살던 너무나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시집을 와서야 신랑이 천식 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50여 년 전의 천식은 발작이 일어나면 손 쓸 사이도 없이 생명을 잃었던 병이었다. '봄'님의 남편은 힘든 일도 하지 못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원 입원을 반복하며 평생을 보내다가 20년 전 돌아가셨단다. 쌀 7 가마가 나는 논이 재산의 전부였던 가난한 집, 평생 병치레를 하는 남편을 대신하여 어머니는 새댁 때부터 남의 집으로 품팔이를 다녔다. 새벽에 일어나 해가 뜨면 집을 나와 해가 질 때까지 남의 집에서 일을 해주면 사정을 딱하게 여긴 주인이 아이들 먹일 밥까지 내주었다. 어머니는 그 밥을 가져다가 오 남매를 먹였다. 

"어느 날은, 해가 져서 어둑어둑한데 애들 걱정에 서둘러 집에 왔더니 큰 아이들 셋은 집에 없고 어디서 아이 우는 소리는 들리는데 아이가 안보이지 뭐야, 자세히 보니까 살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방에 남의 집에서 얻어다 옷장으로 쓰던 반닫이 밑에 두 살배기 막내가 들어갔다가 못 나오고 끼어서 울고 있어. 똥오줌을 싸서 범벅이 된 채 우는 아이를 개구리 모양 두 다리를 잡아당겨서 끌어냈지"

내가 우니까 어머니도 울고, 어머니가 우니까 나는 더 슬펐다. 나는 휴지를 내어 어머니 손에 쥐어 드리고 눈물이 쉬지 않고 솟는 내 눈을 휴지로 막고 있어야 했다.  


 "큰 딸이 고생 많았겠어요!"

내 말에 어머니가 더 우신다. 우리는 휴지를 붙들고 눈물을 닦느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큰 딸 고생한 건 말도 못 하지..... 아침에 학교 가면서, '엄마 오늘은 누구네서 일해?'하고 물어보고 학교 끝나면 책가방을 매고 나 일하는 들에 와서 나 보다 하나라도 더 지가 많이 하려고 기를 쓰고 어린 게 지 몸집보다 큰 짚뭇을 묶어서 해가 지도록 나랑 같이 일을 했어..... 어쩌다가 양말이라도 몇 개 사면 '엄마, 나는 뚫어진 거 신어도 안 창피하니까 동생들 줘요' 했고, 속옷도 저는 다 헤진 걸 입어도 안 창피하다고 동생들 다 주라고 하고.... 지금도 우리 큰딸이 그렇게 잘해. 엄마가 세상에서 최고로 장한 어머니라고 하고, 별 용건이 없어도 '엄마 사랑해' 이 말하려고 일부러 전화하고.... 나야 부모니까 자식들 먹어 살리느라 당연히 고생한 거지만 우리 애들은 하나같이 부모를 잘못 만나서 짜장면 한 그릇을 먹고플 때 못 먹어 보고 컸어. 그랬는데도 지금 오 남매가 다 잘됐어. 하나같이 처진 놈 없고 다 잘 살아. 나한테는 말할 것 없이 잘하고."

"어머니가 복이 있으시네요."

"우리 영감이 복이 없었던지, 영감 죽고 나니까 농사도 그렇게 더 잘 되고.... 그래도 우리 영감이 너무 불쌍해. 평생 짜장면 한 그릇도 못 먹어 보고 죽은 지 20년이 되었네... 내가 혈압이 높아서 그렇지 허리 다리는 별로 안 아파서 지금도 일을 많이 하지. 남의 논두렁이고 빈 땅에 아무것도 안 심는다고 하면 들깨며 콩을 다 심어서 그걸로 돈을 만들었어. 내가 시집올 때 아무것도 못해오고 그렇게 서럽게 왔잖아. 사실은 우리 애들 오 남매 시집 장가갈 때는 제대로 이불이라도 해주고 싶어서 손바닥만 한 땅을 담보로 잡아서 대출을 받았었지. 빚을 져서라도 애들 제대로 해서 결혼시키고 싶더라고. 그래도 내가 기를 쓰고 일해서 그 빚 다 갚았어.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했나 몰라. 지금은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여전히 하던 버릇이 있어서 쉬지 않고 극성맞게 일해. 그런 거 다 팔아서 돈 모았다가 손주 대학 학자금도 대주고 간 겨울에는 취업한 큰 손주 차 사라고 천만 원 보태줬어요."

"아이고 우리 어머니 대단하시네!"

"그래도 오래 살 복은 있는지 영감 죽어서 집에서 초상을 치르는데, 옛날에는 다 집에서 초상을 치렀잖아. 이상하게 내가 목이 뻣뻣하고 안 돌아간다고 했더니 딸이 날 끌고 여기 보건소를 왔어요. 혈압을 재보니 300이지 뭐야. 소장이 펄쩍 뛰면서 어서 가서 입원하라고 해서.... 초상 치르다 말고 병원에 갔더니 거기 병원 의사도 한 발만 늦었어도 쓰러졌다고 당장 입원하라는 거야."

"아버님이 어머니는 살리고 가셨나 보다...."

내가 흔히 어르신들 하는 말을 흉내 내 보았다.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신다.

"다들 그러던 걸, 영감이 착해서 나 고생 많이 했으니까 애들 효도받고 더 살다가 천천히 오라고. 나는 살리고 갔다고."

울다가 웃다가 하며 혈압도 재고 혈당도 재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체크를 한다. 비록 고혈압, 당뇨, 고지혈증을 다 가지고 계시지만 아픈 데는 없으시다고 하니 다행이고 혈압과 혈당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모두 정상 범위이다. 두 달 동안 드실 약을 조제하면서 내내 어머니는 다음에 오실 땐 고구마를 좀 가져다주겠다고 하신다.


 우리 어머니 또래 세대의 삶은 거의 다 가난하고 못 배우고 무능한 남편을 만났다. 나도 가난하니 나랑 비슷하게 가난한 사람을 만날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들이지만 그 누구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으신다. 그 남편들이 무능한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배울 기회, 뜻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란 걸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 역시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하는데 역부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여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신 부모님들이다. 남 탓할 겨를도 없이, 안 자고 안 먹고 허리띠를 졸라매고 해뜨기 전부터 해가 져 캄캄할 때까지 쉬지 않고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지만 식구들의 배를 불려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탓하면서 평생 자녀들에게 죄인으로 사셨다.


 '봄'자 어머니와 같이 우리 어머니들 모두 그러셨다. 희망을 품고 자식들에게도 희망을 물려주려 애쓰며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히 사셨다. 비록 나는 부모를 잘 만나지 못해서 누더기를 입고 시집을 왔지만, 자식들만은 나의 삶을 물려주지 않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해가 질 때까지 소처럼 일을 했으리라. 빚을 내서라도 자식들에겐 제대로 된 혼례를 치러주고 싶으셨던 그 어머니를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 어머니에게 화관이 되어 준 자식들의 사랑과 존경이, 어머니에겐 인생에서 자신이 이룬 만져지지 않는 트로피이다. 늘 그러신다. '아무것도 사 오지 마. 엄마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누더기를 입고 시집오신 어머니지만, 애들이 옷을 사 오는 것이 제일 아깝다고 하신다. '그거 입고 어디 갈 데도 없는 걸...' 하신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용돈을 풍족하게 주지만 돈 쓸 곳이 없다신다. 자식들이 준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다시 손주들에게 주신단다. 평생 배를 곯았을 텐데, 먹고픈 것도 없다고 하신다. 그저 대룡리 나갈 때 짜장 한 그릇 사 먹으면 그게 최고로 맛있으시단다.


 80세의 '봄'자 어머니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우리 친정 엄마도, 진료소 앞집 루시아 어머니도, 오늘도 소처럼 일만 하시는 송산 마을 동건네 할머니도 돌이켜 보면 자식들에게 미안한 일뿐이라고 하신다. 좋은 부모이면서도 좋은 부모가 되어 주지 못하셨다고 하신다. 하지만 온전하게 바르게 살아가는 자식들과 그의 자식들을 보면 그 집안의 내력을 알 수 있다. 그분들이 새하얀 눈밭에 다리가 푹푹 빠지면서도 바르게 걸으셨던 까닭이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나고 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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