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부티 Apr 22. 2024

나의 다정함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다정을 미워하지 않는 법을 찾지 못했다. 그와의 마지막 연락에서 나의 다정이 새어 나와버린 이후로 나의 다정을 미워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쓸데없이 사람들에게 마음을 많이 써서 맨날 상처받고 배신당하고 소진되면서 끝끝내 품고 태어난 사랑과 다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가 죽도록 싫었다. 숨기려고도 하고 없애보려고도 했는데 절대 사라지지 않고 끝끝내 자신의 존재를 발하는 것이 다정의 속성, 다정을 지니고 태어난 이들의 숙명이었다. 나는 나의 선함이 싫었고 사람에게 향하는 미움 없고 좋은 마음이 싫었다. 누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해도 같이 싫은 마음이 드는 게 아니라 왜 나를 싫어할까 걱정하고 혹시나 내가 상대에게 실수한 게 있었는지 검열부터 하는, 상대와의 모든 순간을 곱씹으며 성찰하는 내가 힘들었다. 정말로 상대의 순전한 공격이더라도 나도 상대가 똑같이 미워지고 함부로 대해지면 조금은 편할 텐데 그게 도무지 되지 않는 사람이 나였다. 언제든지 그 사람과 다시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며 상대를 마음속에서 사랑해 주는 사람이 바로 나이다.

그런데 세상은 너무 거칠고 험난하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날을 품속에 감춰둔 채 내 앞에서는 웃었다. 그러다 자기가 불리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변하여 자신의 이익과 위신을 먼저 챙겼다. 사회는 냉혹하고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나도 그들처럼 사회적 탈을 쓰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직장에서 차갑고 사무적인 사람으로, 가게에서 최소한의 예의만 지키는 사람으로, 가족에게 가족이란 이유로 많은 것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보았다. 그런데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하려고 할수록 나는 점점 뻣뻣해지기만 할 뿐이었고 그래서 작은 충격에도 휘청거리고 깨지기 쉬운 사람이 되어갔다. 내 안의 사랑과 다정을 감추느라 반대의 사람인 척 흉내 내고 사는 건 이 사회를 사랑과 다정을 품은 인간으로 살면서 감내해야 하는 연약함과는 또 다른, 유연함과 웃음을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인정했다. 나는 투명하고 부드럽고 말랑하다고, 적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기엔 그런 점들이 나의 연약이 될 수 있다고. 나의 강하지 못한 성정이 약점이 될 수 있고, 무엇보다 이런 성정을 가지고 사는 건 아주 많이 힘들 거라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살아서는 바꿀 수 없는 나의 심성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여전히 나는 내 안에 흘러넘치는 사랑과 애정과 연민을 조절하지 못해 내가 마음을 많이 주었다는 사실을 지나고 나서 깨닫기도 하고 그래서 후회하기도 하고 상처받기도 한다. 사람과 일과 내가 맺고 사는 모든 관계에서 나를 지키면서 그 모든 것들과 관계하고 유지하고 부대끼며 사는 방법을 알지 못해 나는 여전히 나와 대상의 안전거리를 조절하는데 서툴고, 내가 상대에게 품은 마음과 실제로 가져야 하는 마음 사이의 간극을 다스리는 것을 어려워하며, 늘 한참 있다 아차 한다. 그리고는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는 사실에 늘 나는 왜 이럴까 슬퍼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에게 정이 많은 게 잘못은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그 자체로 좋아하는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상처받을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사랑이 많은 내 잘못이 아니라 그 사랑을 온전히 흘려보내지 못할 정도로 이 사회가 서로에게 너무 날 서 있는 현실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늘 선한 사람이 될 수는 없고, 늘 나보다 우리를 우선할 수는 없기에 혹은 함께 좋은 방향으로 사고하고 행할 수 없기에 나도 욕심을 부릴 때가 있고, 내 것을 먼저 챙길 때가 있으며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화가 날 때도 있다. 그러면서 나는 크고 있다. 내 안의 사랑과 다정을 지키면서 내가 다치지 않는 법을 찾고 있다. 내 안에 가득한 그 사랑과 다정을 정작 단 한순간도 내게 향해본 적 없다는 걸 깨닫고는 흘려보내지 않고 내 안에 가두어 보고 있기도 하고 내가 결핍되지 않을 양만큼 모아두고 나머지를 흘려보내기도 하면서 나와 상대 사이에서, 나와 밖으로 흐르는 사랑과 다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보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사랑과 다정으로 환해졌으면 하니까, 나도 그 사랑으로 밝아졌으면 하니까. 나도 누군가의 다정으로 나를 마음에 들어도 해보고 세상이 조금은 살 만하다고 느꼈으면 좋겠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과 다정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사랑과 다정이 나를 해하고 다치게 했어도 단 한순간도 그 사랑과 다정을 내게 써보려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그래도 사랑과 다정이 있는 사람이, 삶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울 거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의 이 사랑과 다정을 조금만 떼어 나에게 쓰기로 했다. 덜컥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 버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 또다시 상처받고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나의 사랑과 다정을 믿어보기로 했다. 아무에게도 받지 못한 사랑과 다정을 어쩌면 나는 내가 나에게 줄 수 있기에 이 결핍을 아파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른다. 내가 사랑과 다정이 많은 사람으로 태어난 건 내가 나로 나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축복의 구원의 손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사랑과 다정이 많다는 사실을 이제는 어여쁘게 여길 수 있을지 모른다.

다정과 사랑이 많은 건 축복이다. 잘못이 아니다. 나는 이제 그 축복을 나에게 내려주려고 한다. 사람에게는 타인으로부터 충족되는 사랑과 다정,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충족되는 사랑과 다정, 두 종류의 사랑과 다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타인에게 받아 채워지는 사랑과 다정의 결핍이 있고 이제껏 이 결핍을 내 안에 샘솟는 사랑과 다정을 더욱 사람들에게 흘려보냄으로써 채우려고 했다. 하지만 채우지 않고 흘려보내기만 하는 사랑과 다정은 계속 그 결핍의 깊이를 더해갈 뿐이었다. 이제 그 물길을 바꿔 내가 나에게 타인이 되어 그 결핍의 숨구멍을 채워주려 한다. 그러면 나는 구멍이 뚫려 바람이 숭숭 드나들던 내 텅 빈 마음을 차곡차곡 채워, 나를 지키면서 나의 다정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더 이상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로 상처받지 않으면서 나의 다정이 쓰임 받는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그에게 보인 다정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건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마음이자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사랑받기에 충분한 사람임을 경험하게 하는 표현이니까. 내가 그에게 말로써 건넨 다정함이 그와 내가 통하지 않았기에 거절당한 다정인 것이지 그 다정이 이기적이고 나쁜 다정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내가 품었던 다정을 더 이상 곱씹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너는 그 자체로 어여쁘다고 속삭여주며, 내게서 샘솟아 주어 고마웠다고 말하며 보내주고 싶다. 나는 나의 다정이 고맙다. 어여쁘다. 그래서 이 다정이 가능한 오래 살아남았으면 한다. 세상을 향해, 상대를 향해 얼굴을 들어 올린 다정에 먹구름이 드리워 다정이 상처받고 숨지 않기를, 여전히 다정만이 세상과 삶과 날카로워진 사람들의 모든 어지러운 마음을 뽀송하게 기름칠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다정의 힘을 믿고 함께 다정해지자고 외치고 싶다. 함께 다정할 때 다정의 힘은 더 세지니까. 다정만이 구할 수 있는 세상이 있으니까 그리고 그 세상은 지금보다 아름다울 게 분명하니까.

사랑은 세상을 구하고 다정은 사람을 구한다.

keyword

Brunch Book

사랑의 무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