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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pr 19. 2024

나는야 감정의 꼭두각시

내가 이토록 사랑 앞에 무참히 흔들리는 사람이었다니


 하루에도 그를 생각하며 몇 번을 감정의 이편에서 저편으로 왔다 갔다 하는 나이다. 내가 출근할 때쯤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를 생각하며 괜히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아침에 눈을 떠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와 있는 그의 답장에 가슴이 설레서 폭발할 것만 같다. 그의 이름 세 글자가 휴대폰 첫 화면에 떠 있는 그 기분 좋음에 눈꺼풀이 무거운 줄도 모르고 잠에서 깨어난다. 내가 보낸 문자에 그가 어떻게 대답했을지 궁금해서, 그의 생각과 그의 문장과 그의 하루가 그 속에 어떻게 다 담겨있을지 밤새도록 궁금해하느라 잠도 다 설친 채로 나는 그 어느 날보다 가볍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문자 속에서 그의 마음을 가늠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이 어떤지 가늠한다. 어떻게 해도 절대 알 수 없는 그의 마음인 걸 알면서도 괜히 나는 그가 보낸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내 답장이 부담이 될까 혹은 내 마음을 들키게 할까 염려되는 마음에 연락을 정리할 타이밍을 잰다. 나는 그와 연락하는 게 즐거운데 그는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에게 우리가 아는 사이가 되기도 전에 내가 불편해지면 안 되니까 나는 이 관계의 거리를 숨 쉬듯 재고 있다. 이제 서로에 대해 알기 시작했는데 내 마음을 너무 보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기도 전에 나와 그 사이의 어떤 가능성도 사라지게 될 테니 나는 계속 조심하고 검열한다. 그와 친구라도 되고 싶어서 그에게 향하는 마음의 크기를 제한하고 그와의 거리를 조절한다. 그는 이런 내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데, 내가 너에게 보내는 문자 속 조사 하나 모음 획 하나까지 정성 들여 쓰는지 꿈에도 모를 텐데. 


 내게 오는 답장의 간격을 확인한다. 답이 늦을 때면 일이 바쁜가 하다가 점심시간에 답을 보내면 오전에 내내 바빴구나 생각한다. 다음날엔 출근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을 보내서 오늘은 조금 여유가 있나 보다 하면 퇴근 시간이 훌쩍 넘어 다시 답을 보낸다. 나도 바로 답을 할 생각은 아니라서 그가 답이 늦게 와도 상관은 없으나 오래도록 답이 오지 않으면 나는 그를 기다리느라 점점 열이 오른다. 휴대폰 화면을 톡 하고 치기 전의 기대와 화면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은 공백을 확인하고의 실망이 교차로 반복되며 점점 힘겨워진다. 그렇다. 나는 그의 문자를 내내 기다리고 있다. 내가 그를 좋아하니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늘 그에게로 기울어져 있는 시소에 타 있는 거다. 그는 언제든 오르내릴 수 있지만 나는 그가 내려야만 이 시소에서 내릴 수 있는, 그에게 꽁꽁 묶여 있는 탑승자다. 그래도 그와 작게라도 무언가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즐거워 나는 여전한 기대감으로 애꿎은 휴대폰 화면만 유심코 툭툭 치게 된다. 어떤 날은 밤이 늦도록 오지 않은 답에 떨리는 마음으로 대화창에 들어가 보고 여전히 떠 있는 숫자 1 하나에 내 모든 안도와 절망을 동시에 느끼다가 또 어떤 날에는 사라져 있는 1을 보고 내가 그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고 지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러다 답을 보냈는데 안 갔다는 그의 연락에 그도 이 대화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 환희가 되어 나는 조금 더 가봐도 되겠다는 용기를 가진다. 그러다 결국 영영 오지 않은 그의 답을 확인하고 나는 부끄러움과 쪽팔림과 의아함을 견디며 몸서리치고, 그러다 그의 의중이 뭔지 헤아리려 하고, 결국 나의 실수인 것만 같아 자책하고 만다. 나를 괴롭히는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정신이 들 때쯤 아무리 그래도 답을 아예 하지 않은 건 최소한의 예절조차 지키지 않은 거 아니냐며 화가 난다. 


 분명 이 대화창에는 대화를 정리하려고 한 내가 있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말로 답을 하는 그가 있었다. 그가 이 연락을 계속하는 게 괜찮은 건지 긴가민가하다 이 대화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확실히 받고는 연락을 계속 이어갔는데 어째서 내 답이 무참히 내동댕이쳐진 건지, 작은 이모지라도 표시하지 않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가슴이 답답해진다. 내가 마지막에 너무 다정했나? 내 마음이 너무 티 났나? 문자로도 느껴지는 나의 발랄함이 있었나 그게 너무 부담스러웠나? 온종일 자기 검열을 반복하다 나는 오직 후회와 부끄러움으로 나를 쉬지 않고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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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 며칠을 끙끙거리며 앓다가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유일하게 알고 있는 친구 M에게 내가 보낸 말들을 들려준다. M은 괜찮긴 한데 굳이 곱씹어보자면 쓸데없이 다정했다고 했다. 이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까지는 아닌데 그래도 다정함이 너무 보인다고 했다. 아, 절망이다. 내가 너무 부담스럽게 했구나, 내내 조심하다 결국 앞서가 버렸구나. 후회와 자책으로 물든 나날이 종결되지 않고 다시 이어진다. 이제는 나의 의심이 아니라 사실인 채로 자책이 마땅한 채로 답이 오지 않은 그를 미워할 수도 없이 후회의 늪을 건넌다. 몇 번이나 그와 나 사이의 대화를 다시 읽어봤다. 어떤 때는 좀 발랄하긴 했다 싶다가 또 어떤 때는 말을 예쁘게 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렇게 적어 보냈을 수 있는 느낌이었다. 결국 남사친이 없는 나는 그나마 가까운 남자 직장동료 유남동을 찾아간다. 어떻게 대화가 시작되었고 어떤 말을 나누었으며 나와 그의 답장 포인트들에 대해 설명하고 그의 의견을 구한다. 유남동은 내가 한 생각과 거의 비슷한 답을 들려주었다. 내가 연락을 끝내려는 답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는 답장을 한 건 그이고, 분명 그도 이 대화에 자신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표현했다고, 내가 보낸 문장들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고 되게 예쁘게 대화를 잘 마무리하려고 한 느낌이라 오히려 고마웠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유남동은 그를 다시 못 보겠다는 나에게 실수한 느낌도 아니고, 마음이 티가 나지도 않았고, 부담스럽게 하지도 않았다며 그냥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라고 했다. 왜 내가 불편해서 피해야 하냐고 반문했다. 


유남동의 그 말에 쓸데없이 흘러나온 나의 다정을 내내 미워하다가 용기를 얻고 다시 그 앞에 서는 날이 왔다. 그는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하나도 모르겠었다. 그래도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기에, 내가 상대의 입장은 아랑곳 않고 내가 좋아하는 마음만 생각하며 멍청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한 건 아니기에, 

나는 오히려 숨지 않고, 피하지 않고, 그 앞에 섰다. 

그 앞에서 도망친다면 그건 내 마음을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 같아서 그것까지 한다면 내가 나에게 실망할 것 같아 나는 더 꿋꿋하게 원래대로 말하고 평소처럼 행동했다. 내가 그때 조금 그를 피해 있었다면 그와 다시 편해질 수 있었을까. 내가 조금 꺾였다면 그래서 그 앞에서 잠시 물러나 있었다면 오랜만에 만난 그와 다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을까. 그가 나를 피하고 나는 그를 외면하며 시간이 꽤 흘렀어도 여전히 그 순간을 곱씹지 않을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선택에는 늘 성공만이 존재할 뿐이고 내가 가보았기에 아는 길에 옳았던 선택이라는 확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덜 후회할 수 있는 건 그 앞에 서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럽고 후회스럽고 도망가고 싶었던 순간에도 나는 나를 선택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앞에서 숨고 싶었지만 내 마음에 부끄러운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숨지 않았고, 내가 나에게 당당하고 싶었기 때문에 도망가기보다는 마주 서기를 선택했다. 통과해 온 시간 속에 그런 내가 있다. 그런 내가 있기에 나는 여전히 괜찮다가도 한 번씩 이불을 박차고 포효를 하고 나의 어쩌지 못하게 흘러나온 다정을 곱씹고 후회로 물들지라도 나의 이런 심성을 미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심이 되고 내가 했던 사랑이, 내가 앞으로 할 사랑이 어여쁠 거라는 믿음이 내 안에 확실하게 있다.


 그와의 일련의 만남과 대화와 연락을 통과하며 나는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이렇게 감정변화가 크고 많은 사람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를 볼 생각에 아침부터 신나 있고 막상 그가 내 앞에 있으면 심장이 덜덜 떨려서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시선은 애꿎은 다른 사람만 향해 있다. 그러다 용기 내서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마주치고는 바보가 되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불쑥 용기가 튀어 올라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에 애정을 꾹꾹 눌러 담아 부르고 그만 신이 난 상태로 귀여운 원래 내 말투가 나와버리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무언가를 건넬 때는 온몸이 파르르 떨리는 걸 겨우 참고 건네고는 진이 다 빠진 채로 널브러져 있고, 또 어떤 때는 이미 그 앞에서 얼음이 되어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 채로 이렇게 서툰 나를 원망하며 터덜터덜 집에 돌아오기도 했다. 그 앞에서 용기 내어 선물을 내밀었을 때 환하게 웃는 그의 조막만 한 얼굴에 가득 찬 그 미소에 녹아내릴 것 같았고 그의 연락을 기다리다 정말 녹아버린 나도 있었다. 그러다 무참히 씹힌 나의 다정이 나를 절망과 붕괴로 이끌기도 했고 그와 있을 때의 나와 그가 나눈 말들, 또 몇 번의 만남이 생각나 평온과 창피 사이를 숱하게 오가며 하루를 살고 있기도 하다. 사랑할 때면 감정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서 있다가 넋 놓고 그 풍파를 맞고 있기도 하고, 그러다 퍼뜩 정신 차리고 어떤 순간에도 나를 가장 최우선으로 아끼려는 내가 또 있다. 무참히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나의 중심을 지키고 그곳으로 돌아오려고 하는 나는 현명한 감정의 꼭두각시이다. 그 사실이 내게 위안이 된다. 사랑 앞에서 무력해질지라도 끝내 나를 해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과 사랑에 무적해져도 절대 나를 포기하면서까지 그 사랑을 지키려 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이 두 가지 믿음이 사랑에 정신없이 흔들리는 내게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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