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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부티 Apr 24. 2024

네가 나를 놓친 거야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


 나는 좋은 사람이다. 내 안에도 삐뚤삐뚤 모난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좋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내가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힐난한 그 이유는 바로 내 안의 따뜻하고 정 많고 흘러가는 마음들이 너무 크고 거대해서였다. 그리고 세상을 살면서 사람에게 사람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과 정은 모두에게 필요한 성정이지만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나에게는 그 마음들이 모두 나의 약점이 되었다. 그래서 모두가 나에게 비난하고 어여쁘게 봐주지 않는, 가족마저도 나의 큰 사랑을 내가 겪는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비난하는 고통 속에서 나는 그 따스함을 부단히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고 죽이려고 해도 죽여지지가 않아서 나는 내내 나를 깎아내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매번, 계속 내가 되었다.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이 어떻게 인력으로 되는 것인가. 사람이 사람을 그냥 좋아하는 게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마음일 수 있듯 나는 늘 사람이 좋았고, 사람을 좋아했고, 마음을 주었다. 앞뒤를 가리고 사람을 구별하며 마음을 주는 것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에게 사람을 가려가며 내 마음을 주고 관계를 맺는 것은 배워야 하는 학습의 대상이었다. 나는 모든 사람이 좋아 보였고, 모두에게 진심이었고 미워지는 사람이 없었다. 나를 곤경에 빠뜨려도, 나를 함부로 대해도 도무지 그 사람이 미워지지가 않았다. 나에게 나를 괴롭게 하는 이는 언제라도 다시 괜찮아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나를 바보 같다고 할 테고, 누군가는 미련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았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의 성정이 이러하다.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운명, 누구라도 품고 보듬을 수 있는 사람, 모두가 좋은 사람. 한결같이 똑같은 마음의 크기로 한 자리에서 상대를 바라보며 곁을 내어주고 품을 내어주고 마음 한 켠에 너를 담아줄 수 있는 사람. 지치지 않고 지루해하지 않고 아주 오래도록 너를 향해 마음을 쏟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이다.


 누군가를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품고 있고 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어 내가 누군가에게 빠져들기 어려운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지 않아도 늘 사랑을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누군가를 보고 괜찮다, 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그 괜찮다는 인상이 호감으로, 나아가 이성적 감정으로 발전하는 게 어렵다. 그 한 단계를 뛰어넘는 것이 나에게는 어마어마한 ‘사건’인 것이다. 내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과 그냥 스치는 사람에게 향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아서, 모두에게 늘 같은 큰 마음으로 다하고 있어서 특별히 특별한 어떤 사랑을 줄 사람이 필요치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구보다 그 특별한 감정을 나누고 받고자 원했으면서, 누구보다 그 감정의 교류와 이를 통한 충만과 회복이 필요한 사람이었으면서 그 결핍을 타인으로부터 받는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아닌, 내가 주는 마음으로 채우는 사람이어서, 받아본 적 없는 큰 사랑에 늘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어서 그래서 늘 한없는 마음을 내뿜고 있어서 상대를 보고 설레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관계가 쉽게 얻어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 내가 누군가에게 빠져들었다는 건 그 마음이 한없이 깊어지고 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거란 의미이다. 그 사랑의 마음이 너무나 순도여서 아릴 만큼 시린 사랑이란 말이다. 열다섯 길고도 깊은 첫 사랑을 하고 아주 긴 시간이 흘러 스물여덟, 나는 지독한 짝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예상할 수 없었던, 덜컥 내 마음의 경계를 타고 넘어온 그를 온전히 품으며 아주 긴 사랑이 시작되었음을, 쉽게 저물지 않을 이 사랑이 나를 아주 오래 아프게 할 거란 사실을 나는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이렇게나 좋아해 본 게 처음이었다. 좋아해서 용기가 나는 경험도 처음이었다. 용기가 나는 건지, 용기를 내는 건지 헷갈리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그 마음을 내 안에서만 꼭꼭 숨겨두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에게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표현하려는 내가 신기했다. 내가 이렇게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게, 사랑을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이, 사랑으로 두둥실 하늘 끝까지 떠올랐다가 한 순간에 그를 곱씹고는 휘청거리다 온 내가 그로 가득 차 물로 가득 찬 풍선처럼 빵빵해져 둥그르르 굴러다니는 사람인게 귀엽고 웃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친구들에게 말하는 내가 어이없었고, 그 사람과의 일화에 하늘 저 끝까지 갔다 오는 내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겨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나도 웃겼다. 그 사람을 위해 하루종일 무거운 가방에 그가 좋아하는 귤 몇 개를 더해 발걸음을 옮겨도 그 무거움이 견뎌지는 사람인 것도 신기했다. 그 사람 것만 챙기면 너무 티 나니까 몇 개를 더 챙겨 넣어 티 안 나게, 부담스럽지 않게 혼자 좋아하는 이 마음을 조금씩 흘려보내는 나도 귀여웠다. 어떤 날은 전하지 못한 귤을 덩그러니 바라보며 전하지 못한 내 마음이 거기 그대로 남아 있어 도로 들고 온 가방 무게만큼 이 마음이 무거워져 시를 쓰기도 했다. 


 아직도 귤을 보면 챙겨가서 그에게 하나 건네고 싶은 마음이 나에게 남아 있다. 이 귤 하나를 전해주며 이제는 거기에 내 마음이 아니라 산뜻함을 담아 그냥 편하게 마주 보며 웃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조금은 가뿐하고 조금은 아픈 새로운 소망을 담아 건네고 싶어 진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 귤 챙기는 것을 잊어버리고 나오는, 나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차 생각이 나는 나를 보며 그가 내게서 점점 통과해가는구나 싶어 다행이다가 아쉽다가 울적해지다 결국엔 안도한다. 귤을 챙겨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이 순간에서 마저 귤을 챙기면 나는 어쩌자고 계속 이럴까 싶어 슬퍼질 게 분명하니까 그러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오면 그 생각이 난다. 내가 눈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아진다고 말해서일까, 너는 어떤지 모르겠다는 내 물음에 끝내 답이 오지 않아서일까, 그와 내가 유일하게 같이 있는 그 공간에 여전히 무심히 혼자 외쳐지고 있는 내 목소리가 존재함을 나는 여전히 선명하게 느끼기 때문이겠지. 응답받지 못한 그러나 내 마음에 대한 그의 대답은 명확하게 존재하는 그 무응답의 목소리가 있어서, 여전히 거기 내 물음은 남아 있는데 나는 아직 답을 받지 못했는데 그래도 그 답이 들려서, 그럼에도 답을 계속 기다리는 내가 있어서 그 공간을 아마 평생 열어보지 못하는 애처로운 내가 지금,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너를 이렇게나 많이 좋아했던 내가, 생에 그토록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어 기쁘고 감사했던 내가, 이렇게 고운 마음으로 너를 향했던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거야, 

응. 너가 나를 놓친 거야. 

그 말이 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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