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심호흡을 한다. 음식들은 시간이 지나면 놀랄 만큼 위협적인 모습으로 변신을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너는 언제부터 거기 있었니? 첩첩 쌓인 락앤락 사이에서 숨어 있던 밑반찬 통이 속속들이 등장한다. 뚜껑을 열기가 두렵다. 하얗고 파랗고 검은곰팡이가 서프라이즈!! 하면서 나를 놀래킬 것만 같다. 시금치나물, 우엉조림, 잔멸치 볶음... 깔끔하게 먹어치우지 못한 탓에 조금씩 그릇 밑바닥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쓰레기통에 음식을 버릴 때면 절로 마음이 쫄아붙는다. 누가 볼까 봐 뒤통수도 따끔따끔하다. 결국 이럴 줄 뻔히 알면서 다가올 현실을 외면했던 내 방만함에 치가 떨린다. 이생에서 남긴 음식은 어차피 지옥에 가서 다 먹어야 한다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음쓰통을 보면 미리부터 속이 뒤집어지며 지레 수명이 단축되는 것 같다.
온 세상 사람들이 맛집 찾아 삼만리 여행을 하고, 동네 식당에만 가도 잔반이 산처럼 쌓였던데, 이깟 상한 밑반찬 좀 버렸기로서니. 뭐! 뭐! 어때서! 양심이 찔릴 때면 괜히 배를 내밀며 큰 소리도 쳐보지만, 그런다고 찜찜한 마음이 개운해지지는 않는다.
음식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는 감각은 영혼의 밑바닥에 찐득하게 가라앉은 원초적 신념이다. 생명을 지닌 존재가 제 목숨을 보존해주는 대상에 대해 품게 되는 외경심. 그것은 인간의 탈을 쓴 자가 몸 담고 있는 세상에 지켜야 할 예의와 염치이며, 멋 모르고 까불다가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지도 모르는 원형적 터부에 대한 송구함이었다.
70년대의 출발에 맞춰 세상에 태어난 나의 유년.
음식은 귀한 것이었다. 집은 가난했고, 우리는 삼시세끼 비슷한 것만 먹었다. 식구는 열 명도 넘었기에 밥상에 반찬이 남는 적은 드물었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등장하는, 문자 그대로 간식이라는 것도 없었다. 삶에 졸업식 정도의 큰 사건쯤 벌어져야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항상 조금은 배가 고팠는데, 그 정도의 헛헛함은 체온이 36.5℃인 것처럼 일상적인 느낌이어서 그닥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애들 있는 집이라고 손님이 오꼬시라도 사들고 오는 날이면 응축되었던 갈망이 핵폭탄처럼 폭발했을 뿐.
우리 집의 메인 셰프는 친할머니. 가난한 주방에서 노인이 만들 수 있는 메뉴란 뻔한 노릇이라, 유년의 내가 먹어본 음식은 정말이지 몇 종류 안 되었다. 비슷한 레퍼토리의 반찬이 요일을 나눈 당번처럼 번갈아가며 밥상에 등장했다. 하지만 그 별 볼 일 없는 밑반찬 위에는 언제나 허기짐이 고명처럼 얹혀 있었기에, 그때의 나는 밥 먹으라는 할머니의 호출에 매번 가슴이 두근거렸다.
조부모와 그의 미혼 여식이 넷. 내 부모와 그의 두 자식. 거기에 내 조부의 모친이자 나의 증조모였던 왕할머니까지, 주말이면 도합 열한 쌍의 수저가 꽃처럼 뺑둘러 밥상의 가장자리를 수놓았다. 보리가 절반도 넘게 섞인 깔깔한 밥이 그릇의 적정용량을 심각하게 초과하며 고봉으로 담겼고, 광활한 밥상의 패권은 김치, 나물, 장아찌 삼총사가 차지했다. 커다란 상 한가운데에는 소량의 덴뿌라나 고등어조림 같은 것들이 플레이팅 되었지만, 어리다고 식탐을 봐주는 법은 없었기에, 그런 특별식은 제 몫만 눈치껏 덜어먹어야 했다. 사소한 일에도 왁왁 큰 소리를 치는 할머니의 말버릇 때문에, 재롱을 부린 기억보다 서러워 울었던 기억이 더 선명한 어린 날들이지만, 아무리 속상해도 감히 ‘나 밥 안 먹어!’를 외쳐본 적은 없었다.
그때,
음식은 귀한 것이었다.
행복이었고, 기쁨이었고, 빈곤한 일상에 가장 커다란 위안이었다. 머릿속에는 먹고 싶은 것들의 잔상이 종일 아른거렸다. 어디서 맛있는 것이라도 얻어먹은 날이면 그날은 완전 복 터진 곗날이었다. 궁금한 것도, 신기한 것도 많았던 어린 시절. ‘먹을 것’은 가장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신세계였다.
세상에 이런 맛이 있다니.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맛이 있다니. 내 살과 피와 영혼을 만들어 준 그들과의 어떤 만남은 선명한 프레임에 담겨 마음의 회랑에 전시되었다. 세잔의 ‘과일 접시가 있는 정물’처럼 나의 미술관에는 ‘계란말이가 있는 정물’, ‘김치말이 국수가 있는 정물’, ‘돈가스가 있는 정물’ 등이 걸려 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도 입김 한번 훅 불면 다시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는 그 고요한 정물화 덕분에, 늦은 밤 조도 낮은 맥줏집에서 호프 잔에 딸려 나온 뻥튀기 하나에도 나는 불현듯 그 오랜 시간의 한가운데를 서성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