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도리 Sep 05. 2023

소설-데드리프트 6.

#6.  석쇠 연탄갈비




석쇠연탄갈비


같은 재료를 익히는 일인데, 왜 연료의 형태가 음식의 맛을 좌우하는지, 화학적 지식이 짧은 진으로서는 의아한 노릇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양념한 돼지고기는 프라이팬에 볶을 때와 숯불에 익힐 때, 그리고 일산화탄소에 캑캑거리며 연탄에 구울 때 전혀 다른 맛을 냈다. 일등급 참나무 숯으로 고기에 불맛이 스미게 굽는 숯불갈비도 일품이지만, 구멍마다 벌건 불을 뿜는 연탄 위에 찌그러진 석쇠를 얹어 익히는 연탄갈비는, 맛도 있고 멋도 있었다.


한쪽에서는 구겨진 양은냄비에서 찌글이 김치찌개가 끓었다. 돼지고기 몇 점을 신 김치와 섞어 가위로 다지면 국물이 자작자작 졸면서 돼지기름과 김치국물이 서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물과 기름은 태생적으로 서로를 배척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대의를 위해 개인의 욕망을 포기한 순교자처럼 그 둘은 하나가 되고, 마침내 찌개와 볶음의 경계선 어디쯤에서 최고의 요리가 탄생했다. 


집게로 고기를 뒤집는 진의 손가락에 애수가 가득하다. 운동을 마친 후 온몸으로 뿜어대던 식신의 아우라도 오늘 그녀에게서는 찾기 어려웠다. 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카운트다운을 끝낸 대포처럼 발사되던 분노와 울분도, 오늘은 휴전된 비무장지대의 갈대처럼 고요히 나부끼고 있었다. 영은 여느 때와 다른 진의 모습에 눈으로는 눈치를 살피면서, 손으로는 익은 고기를 연신 주워 먹고 있었다. 


- 인생의 중대한 결정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이루어지는가.


오늘의 보따리에는 데니가 들어 있었다. 마침내 올 것이 오고야 만 것이다. 


- 다음 주면 나 운동이 끝나.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멈출 것인가. 오늘 그것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해.


- 결정을 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은 뭐야?


- 중요한 용단이 다 그렇듯이 문제는 한두 마디로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이야. 쉬운 결정이면 뭐 하러 너한테 털어놨겠어.


강대국과 유불리를 따지며 FTA를 체결하는 고위 공무원의 고뇌도, 지금 진의 표정에 서린 비장함과 비교하면 개나리처럼 발랄한 수준일 것이다. 답변이 어려울 때는 역질문이라는 좋은 수가 있다. 


-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나야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일단 현실적으로 주머니 사정도 고려해야 하니까. 갑부집 고명딸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매달 몇십 만 원이나 되는 돈을 운동에 투자할 수 있는 월급쟁이가 몇이나 되겠어. 그 돈이면 내 워너비 아이템을 달마다 하나씩은 살 수 있어. 시간도 문제야. 사실 직장인의 시간이 어디 퇴근했다고 온전히 내 소유라 할 수 있겠니? 이번 주에 칼퇴근을 할 수 있는 날이 언제인지는 오직 신만이 알고 있어. 일기예보와 같은 거야. 그날 사무실의 공기가 어떠냐에 달려있지. 

근데 운동하면서부터 화요일과 금요일은 퇴근 시간 땡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발딱 일어나 나오거든. 내 뒤통수 좀 봐 봐. 하도 따가워서 다 벗겨졌을 거야. 체력 문제도 있어. 사실 몸 좀 좋아지라고 운동하는 건데, 운동한 다음날이면 피곤해서 완전 겔겔이야. 혓바늘은 이제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장기 같아. 근육통은 어떻구. 하체 운동 뒤에는 똥 싼 바지라도 걸친 것처럼 하루 종일 엉거주춤 걸어야 해. 그래도 명색이 아가씬데... 구두 신고 그런 폼으로 다니니 다들 나보고 큰 웃음 준다며, 사람들한테 인기는 좋아지더라.


진의 말하는 속도가 빨라짐에 따라 고기도 석쇠 위에서 변덕스러운 뒤집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 맞네. 힘들었겠다. 답 나왔네 뭐. 당장 그만둬.


- 그렇게 단순한 문제면 뭐 하러 너한테 털어놨겠어.


누가 붙잡기라도 한 듯 당장이라도 운동을 때려치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침까지 튀겨가며 웅변하던 진은, 정작 경청과 공감이라는 상담가의 고전적 덕목을 실천하고 있는 영의 대답에 힘없이 머리를 가로저었다. 소주잔을 털어 넣는 횟수가 고기를 집어 먹는 횟수를 빠르게 추월하고 있었다. 


- 문제는 데니야. 사람 일이라는 게 참 모를 일이야. 인연이 거기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데니는 내가 자기한테 특별한 사람이라나 뭐라나. 

내가 봐도 그는 이미 나한테 깊이 빠져 있어. 내가 변하지 않으니 오기가 생긴다고도 하더라. 왜 남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자에 대해서 더 안달을 하는 건지... 그 문제에 대해서도 언제 한 번 니가 해석해 줬으면 좋겠어. 분석은 또 너 따라갈 사람이 어딨냐. 

아무튼 그는 이제 내가 뭘 먹는지, 주말은 어떻게 지내는지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간여하고 싶어 해. 뭐 그렇다고 아직 우리가 사귀기로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언젠가 데니가 나한테 ‘반했다’고, 생각하기에 따라 꽤나 노골적인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거든. 그도 조심스럽겠지. 그런 쪽으로는 신중한 타입 같기도 하고. 

맞다, 맞다. 지난번에는 수업하다가 자세 교정한답시고 내 몸을 다섯 군데나 손가락으로 찌르더라. 왜 그런 노래 있잖아. 누가 먼저 사귀자고 옆구리 콕콕 찔렀나. 그 노래가 리얼리즘이었다니. 정말 웃기지 않냐. 아우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한참 웃었다니까. 


두 손으로 박수까지 치며 한참을 까르르 웃던 진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지기 직전에야 웃음을 멈추었다. 진의 표정은 점점 꿈을 꾸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진이 데니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동안, 영은 소주 한 병과 돼지갈비 3인분을 추가했다. 


- 문제는 현실이야. 


영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거나 말거나 이제 진에게 그다지 큰 상관은 없어 보였다. 


- 새삼스레 뭘 바꾸려고 생각하니 골치가 너무 아파서 말이야. 애인 따위 없어도 꽤 괜찮은 삶으로 겨우 세팅 잘해놨는데, 괜히 감당하기 힘든 일 생기면 어쩌나 싶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이기적이잖아. 연애는 얼마쯤 희생을 밑천으로 깔고 시작해야 진도가 나가는 법인데, 내 성격에 어디 순정 바쳐 온몸을 불사르는 게 가당키나 하겠어? 여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야 잘 산다고 하니 그건 좀 다행이긴 한데, 남의 사정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내가 쫓아다닌 줄 오해하게 생긴 얼굴이잖아. 데니가. 

자칫하다가는 남자 얼굴 따지는 머리 빈 여자라는 선입견만 들러붙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쉬운 일은 아니야. 다음 주면 운동을 계속할 건지 말 건지 대답을 해줘야 하는데, 겉으로야 서로 운동을 하네 마네 운동 얘기하는 척 시치미를 떼겠지만, 누가 봐도 운동은 쉽게 말해 핑계고, 고상하게 말해 은유지. 

예스인지, 노인지 내 대답에 따라 데니는 허락인지, 거절인지, 혹은 유보인지 자기에 대한 내 마음을 눈치채게 되겠지. 아, 어떤 결정을 내려도 마음이 아프다. 


급기야 진은 눈물마저 훌쩍이기 시작한다. 주먹만 한 상추쌈을 막 입에 넣으려 입술을 들썩이던 영은 어떤 지점에서 진의 슬픔이 북받쳤는지 파악하기 어려워 눈만 껌뻑일 따름이었다. 진의 앞에는 어느덧 다섯 번째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 짜식이 쓸데없이 마음이 여려가지고 말야. 그 미모에 뭐가 아쉬워서 이런 누나한테… 흑흑 하긴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데 이유가 따로 있나. 그건 이유가 없는 거야. 어느 날 그게 나한테 오는 거지. 사랑이라는 시가. 

니들이 사랑을 알아? 사랑은 저렇게 줏대 없이 수시로 몸을 뒤집는 돼지갈비 같은 게 아냐. 찜통 안에서 제 살이 다 익을 때까지 꼼짝도 않고 맛이 깊어지는 갈비찜 같은 거라구. 

아... 슬픈 돼지갈비. 슬픈 돼지갈비~     


image=hyorang0302.tistory.com/222


Facebook

이 땅의 모든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로 돌연사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신이 소주와 돼지갈비를 인간에게 하사하신 듯.
왜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그런 날 있잖아요?
새삼 고마운 사람들 얼굴이 떠올라 소주가 아니라 그리움에 취해버렸네요.

#일산화탄소 중독, #애정의 도피행각, #사랑이 죄인가요, #연탄갈비 혼술

- 팀장님, 다시 사춘기가 오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직장인은 스트레스 먹고 무럭무럭 자라죠. 
- 열심히 일한 자, 마셔라!
- 나도 돼지갈비 좋아하는데 ㅠㅠ
- 언제 거기서 한번 뭉쳐요. 
- 저녁 안 먹었는데, 아 배고파.
- 댓글 46개 더 보기




* image=blog.naver.com/2505cp/220224541008

이전 05화 소설-데드리프트 5.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