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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도리 Sep 04. 2023

소설-데드리프트 5.

#5. 벤치프레스




벤치프레스


센터에는 가끔 노익장을 자랑하는 노인들이 있었다. 노익장은 왜 늘 자랑하고 싶은 속성을 간직하고 있는지 몰라도, 근육질의 노인들은 유독 과시의 욕망이 강했다. 백발에 하회탈 같은 얼굴만 놓고 보면, 노인정에서 우두커니 장기판을 바라보거나 구부정한 허리로 급할 것 없는 발걸음을 내려놓는 장면이 떠오르지만, 목 아래의 풍경은 전혀 딴판이었다. 그들은 머신을 다루는 데 능했고, 걸음걸이도 빨랐다. 무거운 덤벨이나 바벨을 우렁찬 기합과 함께 들어 올려, 멍 때리던 다른 회원들을 놀래키는 데 도사였다. 수십 년 간 단련된 근육들은 오래된 고목의 뿌리처럼 단단해 보였다. 


노화는 궁극적으로 물과의 싸움이다. 시간을 물처럼 '흐른다'고 표현하듯, 세월이 흐르면 몸에서 조금씩 물이 흘러나갔다. 물을 잃은 육체는 서서히 오그라들다가 마침내 부서지는 것이다. 운동하는 근육은 피를 부르고, 피는 신선한 물을 몰고 육신을 돈다. 


60kg이 넘는 바벨을 가슴에 얹은 채 한 노인이 벤치에 누워있었다. 힘을 주는 순간 노인의 대흉근이 왈칵 솟아오른다. 


- 회원님 오늘은 가슴 근육을 운동하는 날이에요. 벤치프레스는 스쿼트, 데드리프트와 함께 웨이트 트레이닝의 3대 기본 운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상체의 근력과 체력을 만드는 가장 대표적 운동이에요. 상체 근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씀 안 드려도 되지요? 남자 회원님들은 멋진 가슴을, 여자 회원님들은 탄력 있는 라인을 만들기 위해 정말 중요한 운동이예요.


오늘도 데니는 지금부터 하려는 것이 세상 제일 중요한 운동이라는 주장을 하려 슬슬 발동을 걸고 있었다. 뭐든 하루만 살 것처럼 집중하는 태도가 존경할 만했다. 그와 관련해서는 진은 어떤 것에든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 벤치프레스에서 명심해야 할 포인트는 이 운동이 어떤 근육을 단련하기 위한 것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운동하시라는 겁니다. 팔 운동이 아니에요. 양쪽 어깨를 바닥에 꼭 붙이시고, 팔힘이 아니라 가슴 근력으로 바벨을 들어 올리셔야 해요. 어디라구요? 가슴. 가끔 가슴에는 힘을 빼고 팔로만 낑낑거리면서 바벨이랑 싸우시는 분 계신데, 절대 위험합니다. 

벤치프레스는 지금까지 배운 운동 중에서 제일 위험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데드리프트는 중량이 무거우면 그냥 손을 놔버리면 되지만, 벤치에 누워 있다가 힘이 빠지면 큰일 난다구요. 제가 예전에 일하던 센터에서 예순도 넘은 어르신 회원이 역기에 깔려 돌아가셨어요. 센터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고, 아마 신문에도 났을 걸요? 아침잠이 없다며, 회원들이 뜸한 새벽에 운동하기를 좋아하셨는데, 바벨에 깔린 뒤 한참이나 지나서 발견됐었다니까요.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요. 갈비뼈를 비롯해서 흉곽 전체가 크게 골절되어 무너진 뒤였죠. 

아마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아서 평소보다 무리한 중량에 욕심을 내신 것 같은데, 운동할 때는 컨디션 좋은 날이 더 위험해요. 내 능력의 한계가 사라지는 기분이거든요. 그런 날 꼭 사고가 나요. 거뜬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냥 기분 탓이었던 거예요. 벤치프레스는 내 얼굴 위로 쇳덩이를 들어 올리는 아찔한 도전이라는 걸 잊지 마시고, 주제를 잘 파악하신 후 아주 조심스럽게 도전하시는 겁니다. 아시겠죠? 뭐라고 했죠? 주제파악!


오늘의 파트너는 서른은 훌쩍 넘어 보이는 고시생이었다. 총기 없는 눈동자가 검은 안경테 너머에서 진의 실루엣을 재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책상에만 앉아 있다가 앉은뱅이 될까 겁난다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남자는 센터에 등록했다. 법에 대해서는 이 분이 전문가이니, 법률상담 필요하실 예정이면 이 분과 친해두라고, 트레이너는 난데없는 뚜쟁이 노릇을 자청했다. 데니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모르는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이는 걸로 보아 회원이 좀 늘어난 모양이었다. 


진은 벤치에 누워 10kg 바벨에 도전한다. 얼굴 바로 위에 위협적 쇠기둥이 놓여있다. 걸림대에 가로 놓인 그것을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가 가슴 중앙으로 내리기를 반복하면 된다. 어깨를 바닥에 붙이고 허리 근육을 둥글게 모으며 양팔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호흡까지 지키려니 정신이 아득해지고 바벨이 덜덜 떨려왔다. 잠깐만 방심하면 그것은 진의 얼굴에 수직낙하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방심은 가장 위험한 적이었다. 제일 가혹한 적은 결국 나 자신이다. 도처에 함정이 난무하는 세상이라지만, 가까운 곳에 잠복했다가 순식간에 나의 목숨줄을 끊을 수 있는 최고의 킬러는 나였다. 내 목숨을 거둬갈 명분쯤은 언제나 내 안에 다채롭게 마련되어 있었다. 진은 언젠가 영에게 물은 적 있다. 너는 왜 늘 우울해? 별 당연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영이 말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울하지 않을 수 있지?


노인은 시차적응에 실패하여 생을 마감했다. 노인의 생체시계에 따르면 그의 청춘은 손에 닿을 듯한 근거리에 존재했다. 어제보다 분명 하루만큼 늙었겠지만, 오늘의 나는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게 어제의 어제를 몇 번만 거슬러 올라가면 푸르고 아름다운 그날의 나와 만날 수 있다. 노인은 청년의 자화상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기분 탓이었을 뿐. 


탄탄하고 강건하던 젊은 날의 우람한 팔은 수분을 잃고 고목처럼 말라가다가, 제 완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쇳덩이를 밀어 올렸다가 제 몸 위에 내려놓고 말았다. 누군가는 노인의 죽음이 자만심이나 과욕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진은 그것이 모든 사람의 영혼 깊이 박혀 있는 시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혼자만의 속도로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며 이미 한참 전에 잃어버린 것들의 강물 속에서 넋을 잃고 부유하게 만드는 그것.


진의 옆에서 렛풀다운에 열중인 고시생에게도 제 목숨을 앗아갈 이유가 몇 개쯤은 존재할 것이다. 무지개 뿌리를 찾아가는 탐험가처럼 노를 젓듯 케이블을 당기느라 고시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언뜻 봐도 저질 체력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듯, 그 역시도 응답 없는 어딘가를 향해 쇠약한 육체를 던지고 또 던질 뿐이었다. 


- 오늘 수업은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회원님은 오늘 체중 체크하는 날이니까 잠깐 남아서 인바디 하고 가실게요.


등록한 기간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한두 번만 지나면 그와의 수업도 끝이 난다. 그에게도 진에게도 중요한 순간이 임박했다. 

계속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재등록을 앞두고 미리 인바디 상담을 하는 이유는, 회원들이 그만두기로 완전히 마음을 굳히기 전에 트레이너가 상담을 통해 동기부여의 선빵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지불해야 할 액수가 만만치 않기에 진은 머뭇거리는 중이었고, 그 머뭇거림이 눈치 빠른 데니를 긴장시켰다. 그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프로라는 증거였다. 


- 정말 이상하네요. 체지방률이 줄지 않아요. 몸무게도 그대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는데, 뭐가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런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어요. 정말 특이체질이신가 봐. 식단도 분명 꼬박꼬박 지키신다고 하셨죠? 운동과 식단을 병행하는데 꼼짝도 않다니 정말 독한 몸이네요. 이럴 땐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어요. 


- 그게 뭐예요?


자신에게 그의 관심이 온통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진은 날씬한 모델이 부럽지 않은 심정이었다. 


- 독한 몸에는 더 독하게 맞서는 거죠. 안 되겠어요. 우리 운동의 강도를 좀 더 높여 봅시다. 지금 일주일에 두 번 운동 오시는데, 그걸로는 아마 부족했던 것 같아요. 제가 우리 회원님들을 위해 주말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거든요? 원래 오래된 회원들한테만 특별고객관리 차원에서 서비스해드리는 건데, 회원님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저한테 특별한 회원이니까 자격이 되신다고 보고 넣어 드릴게요. 다른 회원들은 들어오고 싶어도 자격이 안 돼서 참여할 수 없는 수업이에요. 10시까지 오실 수 있죠? 아 정말 오기 돋네. 몸은 제일 정직한 거라니까요. 우리 한번 해 봐요. 회원님.  


그의 집념이 명궁의 화살처럼 나를 겨냥하고 있다니! 진은 다시 의지를 다잡는다. PT 등록비로 살 수 있는 물건의 목록을 다이어리에 적으며 아무래도 그만두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던 차였다. 하나쯤 장만해 두면 그럴듯한 자리에 고민 없이 걸치고 나갈 수 있는 트렌치코트의 가격이 때마침 3개월 등록비와 똑 떨어지게 같았기 때문이었다. 데니는 진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패기 넘치는 양손으로 진의 어깨를 꽉 움켜쥔다. 그의 손을 타고 전율이라는 이름의 전기가 진의 어깨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트레이너가 정해준 대로 충실하게 식단을 실천했다. 아침으로는 닭가슴살 6조각과 군고구마 5개를 먹었다. 점심시간에도 근처 식당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바쁜 아침 시간을 쪼개 도시락을 준비했다.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고수하려면 조금 번거롭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짜장면이냐, 육개장이냐 고민하는 동료들을 떠나보낸 후 텅 빈 탕비실에서 삶은 계란 한 줄과 드레싱 한 야채샐러드를 펼쳤다. 낮시간의 부실함을 보충하고자 저녁 식사는 조금 든든히 챙겼다. 주로 소고기 스테이크 600g, 바나나 6개, 토마토 한 곽, 그리고 견과류가 좋다기에 텔레비전을 보면서 심심풀이로 아몬드 한 통을 먹어치웠다. 


가끔 영과 함께하는 한밤의 카니발도 그가 시키는 대로 실천한 것뿐이었다. 너무 기계적으로 절식을 고집하면 허기에 지쳐 오히려 다이어트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으니 가끔은 자기에게 상을 주는 날도 필요하다고, 데니는 지혜와 관용의 제왕 같은 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진은 그가 지나가듯 흘린 그 말을 잽싸게 가슴에 명심했다. 그를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 다른 사람 같으면 모르겠는데, 회원님은 유독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 제가 회원님의 개인 트레이너가 된 것도 인연인데,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노력해 보고 싶어요. 힘드시겠지만, 저를 의지하시고 조금 더 도전해 보세요. 저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함수를 상자로 배운다. 그 상자를 통과하는 순간 어떤 숫자든지 상자의 규칙에 따라 다른 숫자로 둔갑을 하는 것이다. 달라진 그 숫자는 정답이라 불렸다. 데니의 모든 말은 진의 가슴속 상자를 통과하는 순간 마법에 걸린 듯 새 옷을 걸치고 튀어나왔다.

           

관심이라는 옷이었다. 진은 그 마음을 정답이라 여겼다. 


image=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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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운동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어요.  이제 며칠 운동을 쉬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겠어요. 소질이 없어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데니 쌤 최고! 너무 나만 챙기지는 말아 줘요~

#역삼동 PT샵, #칭찬과 고래, #관심은 왕 부담, #내 생애 최고의 트레이너 

- 팀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 대회는 언제 나가요?
- 뭐든 좀 대충 하시라구욧!
- 이제는 운동에도 목숨 거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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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age=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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