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그녀들의 맛있는 키스 > - 우리 이야기
1년 뒤
오랜만이었다. 1년 만에 <맛키>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이 날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다섯 멤버만이 아닌 전 가족들이 다 모였다.
지난 일 년 동안 투병 생활로 혜연은 많이 야위었지만 그녀 마음은 토실토실 해졌다. 물론 암도 많이 호전되어 갔다. 진철과의 부부관계는 마치 신혼부부 같았다. 지난 10년 남처럼 살았고, 밋밋한 결혼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거짓말로 들릴 정도였다. 썰리와의 갈등, 암이라는 어려운 고비를 두 부부가 함께 견디며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두터워졌다. 어쩌면 상대에 대한 애정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가슴속에 싹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준이 만들어 준 벙거지 모자를 뒤집어쓴 야윈 혜연이 소파 중간에 앉았고, 그녀 바로 곁 진철에게 기대어 있었다. 혜연의 다른 쪽 곁에는 오늘의 주인공 지아가 자리 잡았다. 지아의 옆자리는 수민과 세희가 있었고, 지아의 바로 뒷자리에 남편이 서서 포즈를 취했다. 수민의 뒤에는 창민 그리고 세희의 뒤에는 재준이 다정히 섰다. 율을 포함한 지아의 세 아이들은 앞줄 바닥에 앉았다.
모두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체 사진을 촬영했다. 작년 이맘때처럼.
이 날 드레스코드는 베이지, 다크베이지, 브라운 톤이었다. 사진에서 은은한 가을향이 났다.
사진 촬영 후 곧바로 친구들은 큰 샴페인을 꺼내 신나게 터뜨렸다.
" 모두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해 주어 어떻게 말로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뭐라고. 부족한 점 많지만 이렇게 출간을 축하해 주고 어렵게 시간 내어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아는 진심으로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인사와 그녀의 마음을 전했다.
그날은 바로 지아의 그림책 출간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출간 행사 및 사인회는 현준의 기획으로 <맛있는 키스>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가족, 친한 친구들과 우선 축하파티를 했지만 곧이어 공식적인 출간 파티와 사인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해가 저물어 갈 저녁 무렵, 손님들이 하나 둘 입장하기 시작했다.
항암 치료로 면역력이 떨어져 있는 혜연과 아이가 있는 지아의 가족들은 인파가 몰려들기 전에 귀가해야만 했다.
"나중에 사인회 한 거 동영상 보내줘! 우리 막내 지아가 얼마나 의젓한지 몰라. 대견해 지아야."
혜연은 지아에게 큰 포옹으로 지지하는 마음을 전했다.
사회자의 주문으로 지아는 떨리는 마음으로 간의 무대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동화의 한 부분을 낭독하고 한쪽 벽 큰 모니터에서는 그런 지아의 모습이 라이브로 카페에 동시 방송되고 있었다. 지아는 화면에 나오는 본인 모습이 어색할 뿐이었다.
그녀가 집필한 책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보는 동화로, 개성 있는 그림체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책이었다.
낭독을 하자 조용해졌다. 관객들이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곧이어 질의응답 시간이 진행되었다. 환한 조명이 간이 무대를 환하게 비췄다. 그런 빛도 익숙치 않았고, 바짝 긴장된 채로 지아는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새끼손가락이 그녀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 떨렸지만, 다른 한 손으로 잡으며 침착하게 답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던 중 한 남자 독자가 질문했다. 질문하는 남자쪽으로 지아는 무심히 보았는데 문득 그 바로 곁에 낯익은 사람을 본 듯했다. 지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찡그리며 그쪽을 뚫어지게 다시 보았다. 그런데 그 낯익은 얼굴이 사라졌다. 강한 조명 때문에 무대 밖 사람들의 얼굴을 정확히 볼 수 없었지만, 분명 그였던 듯했다. 설마. 잠시 멍하게 그쪽을 바라봤다. 질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말이 없는 지아를 보며 당황한 사회자가 분위기를 모면하려 한마디 했다.
"죄송하지만, 조금 전 질문 한 번만 다시 해주시겠어요? 우리 작가님이 이런 자리 처음이셔서 무지 긴장하신 듯해요. 응원의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큰 박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회자의 도움으로 지아는 가까스로 응답을 하고 다시 어두운 관객석 쪽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 얼굴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잘 못 본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이 작은 이벤트를 알고 찾아왔을 리가 없었다. 연예인이 아닌 바에야 신인 작가의 이벤트는 크게 홍보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잘 못 본 게 틀림없어.'
지아는 그 후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농담도 하면서 오붓한 분위기로 출간행사를 이끌었다.
마지막은 사인회였다. 신인작가의 첫 사인회.
'아무도 사인 안 받으면 어쩌지? 작가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지아는 긴장되고 떨렸다. 책상은 테이블보가 곱게 덮어져 있고, 그 위에 작은 꽃병, 그녀의 책들이 여러 권 전시되어 있었다. 벽에는 이름이 적힌 큰 배너가 걸려 있었다. 지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테이블 뒤에 가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막상 눈앞에서 낯선이에게 싸인을 한다는게 살짝 쑥스럽기도 했다.
첫 사인은 수민이었다. 한결 마음이 편했다. 마구마구 갈겨 사인했다. 그 뒤로 친구들이 줄을 서는데, 바람잡이 제대로 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그 덕분인지 사람들이 주섬주섬 그 뒤에 줄을 섰다. 지아는 낯선이들에게 사인을 하는 이 상황이 신기하고 이상했다. 조금씩 적응이 되자 기분은 좋았다. 좀 더 예쁜 사인을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한 명 한 명 정성스레 사인과 인사말을 적었다.
그때 한 남자가 지아의 신간을 내밀었다. 내미는 팔목에 낯익은 스카프를 보았다. 남자의 손목에 묶인 스카프가 반듯하게 다려져 있었다. 그것은 고이 접어져 팔목을 감싼 후 곱게 매듭지어져 있었다.
지아는 스카프를 보자마자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와 마주쳤다. 정말 그였다. 트러블 JJ.
‘당신 해 낼 줄 알았어. 축하해. 대견해. 찾아와서 미안해요. 꼭 직접보고 축하하고 싶었어요.’
그의 눈빛이 대신 말했다. 지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가 가져온 책에 침착하게 싸인과 함께 짧은 글을 남겼다.
Dear JJ,
고마워요. 그리고……
꼭 건강하고 안전한 여행하시길.
하고싶은 말은 많았지만 표현 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얼굴을 심장에 새기듯 두 사람은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제 다시 스쳐 지나가며 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기에.
“ 아는 사람?“
그가 지나간 후 근처에서 지아를 주시하던 수민이 물었다. 곁에 세희도 귀를 쫑긋했다.
“나의 *로버트 킨케이드.”
수민과 세희는 천둥소리라도 들은 듯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속삭이는 지아의 답변에 친구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때가 되면 이야기 하겠지. 지아와 낯선 남자의 관계는 전혀 몰랐지만, 킨케이드란 이름만 들어도 그들 관계가 가늠되었다. 수민은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 뒷꿈치 들고 목을 뺏지만, 남자는 고개를 숙인채 인파를 헤치고 조용히 그 곳을 빠져 나갔다.
모든 행사를 마치고, 그들은 마지막 와인잔을 기울였다.
그날 밤 그녀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각자의 모습에서, 위치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스스로의 모습이 자랑스러웠기에. 동영상 건너편 혜연도 곧 재기를 약속하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The End
* 로버트 킨케이드 : 소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에필로그
그녀들이 행복해야 할 이유
떡볶이집에서 라볶이를 후루룩 흡입하다 매워서 뜨끈뜨끈한 어묵국물을 들이켰다. 결국 뜨거운 국물에 입천정이 홀라당 데어 울먹이던 십 대 소녀들. 교복 입은 그 소녀들은 분식점에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조잘조잘 미래를 나눴다.
첫사랑에 콜라를 마시며 울고 불고, 두 번째 사랑에 술 한잔 하며 울고불고.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며 결혼했다. 그 후 자녀를 출산하고, 떡볶이 먹던 그 소녀들은 어느새 본인도 모르는 사이 새로운 세상에 편입되었다. 빡센 육아, 가사의 세상으로 말이다.
많은 이들은 육아가사를 체질이라 여기며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어 행복하게 가정을 꾸려간다. (적어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몇 봤다.)
어떤 이는 적응을 하지 못해 혹은 호르몬과 같은 다양한 이유로 끝없는 우울증을 앓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거부하며, 어떤 이는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는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그녀의 안녕이 걱정될 만큼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무섭도록 완벽하게 모든 일을 해내기도 한다.
엄마들은 강한 정신력과 체력으로 아이들을 키워나간다. 그러다가 번아웃이 와서 주저앉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기에.
억센 아줌마라는 소리를 들을때 그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소녀는 상처받는다. ‘난 이렇게 살고 싶어서 사는가.’
많은 그녀들은 아픔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인생을 질질 끌며 앞으로 전진하는 경우도 보았다. 자신이 아픈지도 모른 채 말이다.
물론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그들과의 행복한 시간으로 그 아픔을 외면하기도 한다.
사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이들과의 행복과 내 건강한 자아로 인한 행복은 다르다.
현대 여성들의 지성은 이전과 다르다. 오랜 학문과 독서, 사색등으로 그녀들의 자아는 견고하고 왜 살아가는지 철학을 논의한다. 그런 그녀들에게 무작정 자식을 위해 너를 죽이라고 말하는 건 잔인하다.
아둥 바둥 살던 어느 날, 어느새 중년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된다.
거울을 보면 나를 닮은 내가 있다.
어느새 얼굴은 중력을 견디지 못하고 피부는 늘어져 주름이 지고, 잠을 못 자 늘어지고, 아이들을 이고 지고 뛰어다니느라 등이 휘고, 사춘기 아이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주름은 더 늘고 정신마저 저 세상으로 떠난다. 와중에 갱년기까지 온다면 그야말로 카오스다.
그런데 이게 인생이다.
쇼츠에서 한 여자의 유아부터 할머니까지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이 한창 인기였다. 그 30초처럼 누구에게나 인생의 시간은 그렇게 빨리 흘러가 버리는 듯 하다.
중년이라 하면 삶의 경험과 지혜가 풍부하다고 생각한다.
20대 때 보다 강한 내면을 갖고 있지만,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 강해 보이기 위해 보드라운 마음을 숨길 뿐이다. 그러다 보니 마음병이 생기는 중년도 많다.
건강 또한 이전과 같지 않기에 스스로 늙었다고 새로운 도전은 커녕 하던 일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중년이 되면 결혼한 경우, 이르면 아이들이 성인이거나 늦으면 초중학생이다. 즉 조금의 개인 시간은 생긴다는 뜻이다. 그때 그들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자아가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사라졌음을 인지하기 시작한 이유다. 그렇게 번민하다가 새로운 시작이나 꿈을 향해 도전하는 경우도 많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경우도 있다. 어떤 이들은 적당한 일자리에 타협한다.
사실 여성 뿐만 아니라 중년 남자도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중년 남성들 또한 은퇴와 더불어 호르몬의 변화로 여러 가지 번민이 시작된다. 그들 또한 사람이므로.
열심히 살아온 인생.
결국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삶인데 그동안 지지고 볶고 살아왔다.
꿈을 이루지 못한것도 억울한데, 와중에 아이들이 떠나고 웃을 일마저 사라진다면 얼마나 더 억울한가.
그래서 중년들이 도전적인 정신으로 삶의 변화와 성장을 이루려는 이가 많아졌다.
하지만 아직 경재적인 활동은 지속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녀들은 우주다.
그녀들이 웃으면 가족들도 웃고, 그녀들이 인상을 쓰면 가족들도 불행하다. 그녀들이 행복하면 음식에 사랑이 듬뿍 들어가 다른 양념이 필요 없다. 그런 음식만 먹어도 아이들은 건강해지고 살찐다. 남편도 불끈불끈 힘이 솟는다.
그동안 고생했고, 고생하고 있고, 앞으로도 고생 안 할 거라 보장 못하지만,
그녀들은 행복해야 한다.
우주가 행복해야 세상 만물이 행복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우주가 행복을 원하므로.
글쓴이 말
오늘 그녀들의 사랑과 관계에 대한 인생 이야기를 마무리지었습니다.
이전부터 적어보고 싶던 주제로 이야기를 써 보았어요.
두근거리며 첫화를 시작했습니다. 두세분만 보더라도 버티자라는 마음으로 10만자만 써보자며 적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십만오천자를 적었습니다. Lol
중간에 지쳤던 시간도 있었지만, 끌고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히 방문해 주시는 등불 같은 분들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고개 숙여 큰 인사드립니다.
중간에 지루해지는 듯하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이 더 있었지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정리한 부분도 있다고 고백하고 싶어요. ^^;;
이제 다시 주문해 놓은 책을 더 읽고, 공부하고, 브런치 작가님들의 글들도 찾아 읽으며 한층 더 성장하고 싶으네요. 일단 잠부터 푹 자야겠습니다. ㅋ
곧 <경성크리처 2>, <백설공주>의 드라마 퀸 리뷰와 <아이스크림 먹으러 갑니다>의 남은 회를 준비해서 올릴 예정인데 구독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이따만큼 기쁜 주말 시간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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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부분은 있으나 허구로 구성된 소설입니다. 실제 직업, 인물, 장소, 기관등과 전혀 관계없음을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