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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움 Aug 28. 2024

[소설] 몸의 기억_원영의 몸 (4)

<원영의 세 번째 이야기>

https://brunch.co.kr/@beyonce1983/227




<네 번째 이야기>

원영의 몸_정원영 40세 169cm 50kg 외동딸 맘, 프리랜서 번역가, 큐레이터





“진짜?”

“그렇다니까. 너 선미 언니 알지? 

“응.”

“그 언니도 이 약 먹고 살 쫙 빼서 잡지 화보 찍었잖아, 것도 단독으로.”



체형과 몸무게 관리에 엄격한 원영이었지만 다이어트 약을 먹은 적은 없었다. 매일 아침 공부에 체중을 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며 몸 컨디션에 따라 유산소와 근력 운동을 한다. 매끼 칼로리 계산을 하여 식단을 짜고, 먹고 싶은 대로 마음껏 먹지 못하는 생활에 결코 익숙해지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원영은 그녀의 의지로 충분히 모델에 걸맞은 몸을 유지할 수 있다는 모종의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쉽고 간단한 방법이 눈앞에 있다니. 그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나리의 가녀린 팔뚝과 납작한 배가 원영을 설득하고 있었다.  



처음이니까 일단 반 알만 먹어봐. 촬영이 다음 주라며.”

“그럴까? 살이 많이 찌긴 했어.”



원영은 반 알을 꿀떡 삼켰다.

그날 저녁, 기분 탓인지 약발인지 정말로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입 터짐을 방지하기 위해 단백질 셰이크 한 잔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는데도 평소와 다르게 입맛이 전혀 돌지 않았다. 배고픔을 참는 게 일상인 원영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 시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아침 공복에 운동을 하고 체중계에 올라갔다. 55.0kg  밤 사이 0.8kg가 빠졌다. 운동 후 몰려오는 허기도 없었다. 그렇지만 원영은 평소대로 샐러드와 닭가슴살, 고구마 말랭이를 먹어 두었다. 이런 느낌이구나. 당장이라도 엄마와 오빠들에게 이 약을 복용하게 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약 복용 후 일주일, 빼려고 했던 4kg에 추가로 0.6kg가 더 빠져 50.4kg가 되었다. 


BMI 17.4. 

20대 여성 상위 5%에 속하는 저체중이 나왔다. 원영의 몸도 마음도 정신도 가볍고 개운했다. 평소와 같은 식단, 심지어 중간에 저녁 약속이 두 번이나 있던 주였다. 나리에게 뭐라도 보답해주고 싶은 날이다. 원영은 가뿐한 몸으로 피팅 모델 아르바이트와 쇼핑몰 화보 촬영을 진행하였고, 입금된 돈은 어학연수를 위한 통장에 저금하였다. 



과외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저녁으로 먹을 샐러드와 자몽을 사서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공원을 지나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한 번 터진 눈물은 좀처럼 멈춰지지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최근에 크게 스트레스받은 일도 없었는데 갑작스러웠다. 며칠 후 공원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또 눈물이 주르르 떨어졌다. 이번에도 눈물은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사연 가득한 여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도 힐끔거렸다.  






붉은 고동색 빛의 피부, 목 선을 덮어 버린 이중 턱, 거대한 몸집으로 뒤뚱 거리는 걸음걸이의 실루엣이 원영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원영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 실루엣의 주인은 그녀의 엄마라는 걸. 원영은 가던 길을 살짝 틀었다. 대학교 친구들에게 엄마를 소개해주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지만 원영은 엄마의 모습을 친구들에게 들키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다. 그날 엄마도 자신을 보았다는 걸 안다. 그 일 때문일까. 왜 자꾸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엄마의 고단하고 힘겨운 삶, 거구의 몸이 안쓰러웠다. 오빠들과 나, 우리 셋 키우려고 고생만 하다가 다 망가져버린 엄마의 몸이 엄마의 인생이 처량했고 슬펐다. 그리고 싫었다. 



나리에게 물어볼까도 했지만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차분하고 이성적인 평소 원영의 성격상 격한 감정을 느끼거나 표출하는 일이 없던 점을 감안하면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긴 했다. 생각해 보니 최근 2주간 잠도 푹 자지 못했다. 


“어 나리야.”

“원영아, 촬영 잘했어?

"응, 효과 진짜 좋더라."

“다행이네. 컨디션은 괜찮아?"

“컨디션?”

“그 약 때문인지 요즘 계속 잠이 엄청 쏟아져. 한동안은 평소보다 안 자도 팔팔해서 너한테도 말했었잖아. 에너지가 넘친다고. 그런데 요즘은 완전 다운모드야. 오늘도 재우랑 저녁에 만나기로 해서 나갈 준비 해야 하는데 소파에서 못 일어나겠어. 계속 누워 있는 중이야.”

“그거 때문인가…”


원영은 얼마 전 그녀에게 일어난 변화들, 공원에서의 눈물 바람, 잠 못 이루는 밤들에 대해서 말했다. 나리는 원영보다 일찍 약을 시작한 언니들이나 동기들에게 나타난 증상들을 전해 주었다. 극심한 입 마름, 생리 불순, 부정 출혈 등과 같은 신체적 병세부터 널뛰는 감정, 끝도 없이 쏟아지는 잠 혹은 하루 온종일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잠을 푹 못 자는 불면 증세,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과 같은 정신적인 문제들까지 다양했다. 명백한 부작용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다이어트 약에 대한 의존성은 약을 복용한 기간이 길수록 커지는 것 같았다. 약을 끊자 요요가 왔고 살찌는 게 너무 무서워 다시 약을 복용하게 되었으며 부작용이 커지자 다시 약을 끊고. 약을 끊으니 또 요요가 오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엄마와 오빠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음식 하나 조절 못해 먹고 후회하고 또다시 먹고 후회하는 삶. 원영이 그토록 피하고 싶은 삶의 형태. 절대로 되고 싶지 않은 모습.  



나리는 약을 먹어도 전처럼 살이 빠지지 않아 약 복용량을 늘렸는데 오히려 몸이 붓는 것 같다며 그래서 더 의욕이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수화기를 타고 내려오는 나리의 우울한 목소리를 들으며 원영은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스페인행에 대해 더 이상 가슴이 뛰지도 설레지도 않는 자신을 발견했다. 하고 싶은 일도, 가보고 싶은 곳도 많은 열정 넘치던 원영이었는데… 아르바이트도 영어 공부도 다이어트도 다 무슨 소용일까 하는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최근 그녀를 지배하는 감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리가 말한 알약의 부작용들이 원영에게도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영은 남은 알약을 모두 버렸다. 






스페인 세비야에 도착한 원영은, 그녀가 곧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엄청난 사랑에 빠졌다. 부족한 자금 사정으로 인해 가장 가고 싶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제외하고 남은 선택지 중 한 곳인 세비야를 선택한 거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세비야로 결정한 건 운명적인 이끌림이 아니었을까 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열정 넘치는 완벽주의적 성향인 원영은 스페인에서도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최대한을 누리고 만끽했다. 공부도 생활도 열심히 한 덕분에 스페인에서 주관하고 수여하는 공식 자격증 시험인 델레(DELE) 시험에서 전문가 수준인 C1을 획득했고 스페인어 통번역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엄마를 닮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삶에 대한 애착,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열정, 강한 생활력은 모두 엄마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원영이 가진 최고의 강점들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자산이었다.  



한창 번역 중인 책에서 영국 남자와 미국 여자가 세비야에서 우연히 마주치며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왔다. 세비야에서 귀국한 지도 벌써 17년이 넘었구나, 원영은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음을, 세비야에서 공부하던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를 하던 엄마가 떠올랐다. 






알람이 울린다. 네일처럼 청담 예약.

네일숍에서 나란히 네일과 패디큐어를 받고 있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 원영의 시선에 들어온다. 엄마와 한 번도 네일숍에 온 적이 없는 원영은 그 모녀에게 자꾸 눈길이 갔다. 다정한 둘의 모습이 원영에게는 슬픔으로 스며든다.    



'안 보면 속상하고 짠하고, 보고 있으면 화가 났던,

창피하면서 안쓰럽고,

애처롭지만 원망스러운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 어깨는 좀 어때?’

원영은 끝내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to be continued










[사진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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