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매거진의 마지막 글은 일상으로 돌아온 저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산골짜기에서의 경험이 그 공간에서만 가능했던 특별한 일이 아니길 바랬고, 글을 쓸 생각에서라도 산에서 배운 걸 일상으로 가져오려는 노력을 조금 더 기울이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이죠.
눈 깜박할 사이, 산에서 내려온지도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일상으로 돌아온 저는 조금씩 바빠졌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순간순간 '숨이 가쁘다'고 느껴질 정도였어요. 우선 가족들이 먹을 식사를 제가 차리기 시작했고, 산에 집을 지을 생각으로 컴퓨터 도면 설계(CAD)를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제가 이끌던 독서모임을 다시 시작했고, 골반 건강을 위한 다리 찢기와 필라테스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태극권 수업도 개강했네요.
다 나를 먹이고 돌보는 일들인데 왜 이렇게 바쁜 건지요. 저물어버린 해의 끝자락을 잡고 미처 끝내지 못한 일을 손꼽으며 한숨 쉰 날이 대부분입니다.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한 게 없어도 태평하게 잠들곤 했던 산골짜기에서의 모습과는 딴판인 나날들이에요.
산에서는 '내 몸 돌보기'가 모든 것보다 우선이었습니다. 프로그램 시간이 임박해 급하게 나갔다가도 밖이 추우면 돌아와 머플러를 하나 더 둘러주는 게 우선, 음식물을 남기지 않는 것보다 '더 이상은 먹고 싶지 않다'는 위장의 신호를 받아주는 게 우선, 번뜩 떠오른 글감을 노트에 남기는 것보다 스스로를 재우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첫째는, 몸이 너무 좋아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몸이 하는 소리에 즉각적으로 귀를 기울여 준다는 게 몸과 마음 모두에 그토록 편안한 느낌을 선사한다는 것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둘째는 그동안 내 몸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시했던 많은 일들이 어쩌면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단 걸 알았죠.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사람이 존재할 때 가능한 거니까요. 진짜 (건강하게) 살고 볼 일입니다. 산에 내려가서도 이런 마음의 자세만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다짐하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다른 것들에게 우선순위를 내주기 시작한 저를 종종 발견합니다.
속세(?)에서는 돈도 벌어야 하고 사람들과의 약속도 지켜야 합니다. 나를 찾는 이곳저곳에 불려 다니며 모습을 드러내야 하고, 자기 계발도 게을리할 수 없죠. 산에서 내려온 뒤, 이런 일들이 저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겠다고 앞다투어 덤벼들곤 했습니다. '건강'이라는 키워드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애를 쓰긴 했지만, 마치지 못한 일들을 아쉬워하는 하루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고 순간에 집중하기보다, 시간을 '일을 끝마쳐야 하는 단위'로 인식하고 계산을 하던 예전 습관이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 하루가 숨 가쁘게 바쁠 수밖에요.
산골에서도 빡빡한 프로그램에 시간을 맞춰 생활하는 것이 무척 바쁘게 느껴졌지만 숨이 가쁘진 않았습니다. 건강이라는 가장 중요한 것을 소중히 돌본 하루였다면 다른 것은 완벽하게 해내지 않아도 괜찮았어요. 또 그런 느긋한 마음으로 할 일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몸은 바빠도 마음은 편안하고 고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요즈음의 그 '숨 가쁜' 느낌은 전과 달리 제게 일종의 신호로 느껴졌습니다. 중심을 잃었다는, 청소가 필요하다는 신호요.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신이 팔린 사이 여러 가지 것들이 마음에 그득 들어차 있더군요. 돈을 좀 더 벌어서 안락함을 누리고 싶은 마음,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 결과물을 뽐내고 싶은 마음 등등이요. 이런 마음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 우선순위인 '건강'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마음들인 거죠.
마음을 청소하고 무얼 하든 내 우선순위에 걸맞는 일, '어제보다 조금 건강한 삶'에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나니 메모리카드를 리셋한 것처럼 마음이 순식간에 텅- 비어졌습니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캘린더를 채우고 있는데 어쩜 이렇게 한가롭게 느껴질까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안 하면 목을 조를 듯 압박하던 일들도 갑자기 모두 자기 할 일을 잊은 듯 얌전해져서 저의 간택만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샙니다. 바뀐 건 마음 하나인데, 마음 하나가 세상을 바꾸네요.
그렇게 여유를 갖춘 다음에 마음의 눈을 떠서 제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을 먼저 찾아봅니다. 그런 상태에서 하기로 결정한 것들은 대게 저의 몸에도, 마음에도, 정신에도 유익한 일들입니다.
나를 기쁘게 하고 유익하게 하는 일들이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한 상태가 되면 알아서 드러나게 되는 것 같아요. 한밤중엔 분간이 안되어도 여명이 밝으면 저절로 보이는 '길'처럼요.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곳에서 온전히 자신을 마주해본다면 그 길은 자명하게 모습을 드러낼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찾은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평화롭고 기쁜 마음은 혹여 길을 잠시 벗어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기억에 남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산속에서 고요한 자기와의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하는 이유입니다.
산에서 지낸 스무 여일은 제가 걸어야 할 길과, 그 길을 걷는 방법을 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알려준 제가 걸어야 할 길은 '건강한 삶'이랍디다. 치유를 향한 여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합니다. 요 며칠간 우선순위를 잃고 숨이 가빴던 것처럼 앞으로도 실수와 탈선(?)의 가능성은 호시탐탐 저를노릴 거예요. 하지만 그럴수록 내 길을 찾아 돌아오는 데에도 능숙해지겠지요. 결과도, 과정도 기대되는 꽤 괜찮은 출발점에 선 기분입니다.
그동안 <경북 어느 산골짜기에서>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어떻게 걸어가고 있는지 가끔 생각난다면 찾아와 응원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