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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Jan 17. 2021

죽음을 생각하는 아름다움

 프로그램이 없는 오늘은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독서를,

하고 싶었지만 어찌나 잠이 오던지요. 책만 펴면 스르르, 다시 펴도 까무륵. 여기까지 와서 무슨 열공모드인가 싶어 다 내려놓고 단잠을 잤습니다.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줄 알았던 낮잠은 점심을 먹은 오후에도 뻔뻔하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잠이 이렇게 많은고? 그래도 면박을 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를 껴안으며 "사랑해"라고 말해준 것이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거든요. '신생아가 따로 업네!' 중얼거리며 아기를 눕히듯 저를 침대 속으로 구겨 넣고는 행복에 겨운 미소를 옅게 띄웠을 뿐입니다.


 낮잠을 두 번이나 잤더니 저녁에는 정신이 또렷해져 책 한 권을 완독 했습니다. 제목부터 기가 막힌 <당신의 암은 가짜암이다>. 책 소개는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당신이 진짜암일 경우엔 운명을 받아들이라'는 저자의 단호한 태도가 다시 상기시켜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보통 암환자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하라는 조언을 많이 듣습니다. 죽는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요. 부정적인 생각은 그에 맞는 결과물(스트레스, 면역력 저하 등)을 만들고 이것은 예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 타당한 조언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저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죽음이란 게 정말 최악의 상황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측면에서) 지금 모두 '최악의 상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요?



 처음 암의 존재를 알았을 때 제가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란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한때 '내일 아침이 밝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지겨운 인생이 빨리 끝나면 얼마나 편할까' 생각했던 우울한 날들을 분명히 기억하는 저로서는 죽음이 좀 빨리 찾아오기로서니 호들갑을 떨기에는 머쓱한 측면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암의 존재는 분명 모종의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는데 그건, 죽은 다음에 내가 어찌 되는지 모르고 죽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왜 왔는지 알지 못하고,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게 되는 상황이 두려웠습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닌데, 감사하게도 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 발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신의 계시를 받은 것도, 깊은 명상을 통해 우주의 시그널에 접속한 것도 아니지만, 저는 압니다. 저는 사랑받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것을요.(두둥)


 이야기가 좀 새지만, 잠시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넘어갈게요. 사랑은 '분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와 너가, 나와 사회가, 나와 자연이, 나와 신이 분리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곳에서 '사랑'을 느낍니다. 이런 시각에서는 사랑을 '받는 행위'와 '주는 행위'도 분리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 주체가 하나라면 주는 게 곧 받는 거고, 받는 게 곧 주는 거니까요. 고로 저는 사랑을 주기 위해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두둥 짝!)

 

 내가 왜 이 세상에 왔고, 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이제 좀 알 것 같은 지금에 와서, 제가 생각하는 최악의 상황이란 '인생이 주는 온갖 두려움과 상념에 사로잡혀 삶이 주는 아름다운 순간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랑이고 뭐시고 간에, 세상이 주는 온갖 소음 속에서 우리는 자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죠. 그럴 때 "얌마! 정신차려. 너 그러려고 사니?"하고 경종을 울려주는 킹왕짱 센 친구가 바로 '죽음'입니다. 사후세계는 가봐야 알 일이고, 이 세상 사는 동안은 주어진 모든 순간을 최대로 누려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죽음이 저기 멀찍이 있다고 생각되는 동안 저는 좀처럼 매 순간을 '내 것처럼' 누리지 못했습니다. 맹목적으로 돈을 벌고,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거나 나를 희생하고, 때론 체면을 세우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살았습니다. 그러려고 이 세상에 온 게 아닌데도요.



 

 요 몇일 이곳에서 와서 희망을 발견하고 저는 또 죽음을 까맣게 잊고 말았어요. 발이 공중에 떠가지고 백년대계를 구상하시작했지요. 그러다가 읽은 책 한 권이 잊고 있던 고것을 상기시켜 준 니다.

 

 죽음을 생각하자 출렁거리던 마음은 곧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고, 차분하게 오늘 하루도 내가 잘 사랑하고 사랑받았는지, 주어진 순간들을 충분히 잘 누렸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고요한 성찰의 시간이 얼마나 평온하고 아름답던지요. 백년천년 살 것 같은 기분에 꿈에 그리던 오두막을 마음속으로 짓고 허물기를 반복했는데, 죽는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집에 가면 엄마한테 김장아찌부터 만들어 드려야겠습니다. 짭쪼롬한 김짱아찌 한 장 밥 위에 올려 먹는 그 맛은 둘이먹다 하나죽어도 모를 맛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종종 죽음을 생각해야겠습니다. 그건 분명 제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테니까요.





 석양은 우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서서히 저문다. 우리는 위태로운 삶을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눈앞에서 덧없이 흘러가는, 변화무쌍한 삶에 간절히 매달린다. 우리는 나날이 빛나는 특별한 삶을 찬미한다. 하지만 태어난 모든 것에는 죽음이 따른다. 아무리 다정하고 완벽한 만남도 결국엔 헤어짐이 있다. 

 우리는 스러져가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바람, 뺨에 와 닿는 숨결, 물 한 모금, 힘없이 떨어지는 단풍,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 자신의 삶, 딸기.

 이슬을 머금은 새빨간 딸기 하나.

_샐리 티스데일,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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