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풀려 어제오늘은 공기가 참 푸근합니다. 한 달 넘게 이곳에서 지낸옆방 언니는 오늘 같은 날씨는 정말 귀한 날씨라며 어디 꼭꼭 숨겼다가 추울 때 꺼내 쓰면 참 좋겠다고 넋두리를 합니다.
점심을 먹고 오후 산책을 나왔습니다. 이런 날은 빨래를 탈탈 털어 널어야 하는데 급수 문제가 아직도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아 골치네요. 물을 한껏 실은 물차가 하루 한번 올라오는데 이마저도 반나절이면 동나는 모양입니다. 급기야 병원에선 새 관정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물 걱정 덜 생각에 반갑다가도, 산길을 넘어 오가는 트럭들, 굉음과 함께 지반을 뚫고 들어가는 공사 기계를 보며 생각이 많아집니다. 인간의 이기심은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산책을 가야 합니다.
어제 발견한 명상 오디오가 자꾸 나무 옆에 가서 명상을 하라고 말을 걸어오거든요. 물병 하나, 돗자리 하나 둘러메고 근처 명상의 숲으로 향합니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언덕 즈음 올라와서 신을 벗습니다. 양말도 벗습니다. 자주 해본 것처럼 자연스럽지만 처음입니다. 이런 게 어싱(Earthing)이라나요.
※밤나무가 있는 곳, 뱀이 출몰하기 쉬운 계절이나 장소에선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맨발로 대지와 접촉하면 인체 본래의 전기적 상태가 복원되어 통증과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것이 어싱의 원리라고 합니다. 통증과 스트레스만 완화될까요. 자연이 건강에 주는 이로움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것 이상으로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일 겁니다.
워렌 그로스맨의 <자연치유>라는 책을 본 뒤로 대지와의 접촉이 너무 해보고 싶었던 저는 이곳 일정표를 받고부터 줄곧 어싱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하지만 이례적인 한파로 어싱 수업이 취소되고 교육동의 어싱하는 황토밭엔개미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어요. 아쉬움에 혼자 맨발로 황토밭을 서성거려보기도 했지만 대지의 기운을 받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발도 끔찍하게 차가웠고요.
상황이 이러하니 따듯한 날 산에 오르다 신을 벗고 싶어 진 건 당연한 순리였을지도 모릅니다. 전에 집 근처 산에서 맨발로 등산을 하는 서너 무리의 사람들을 본 적이 있어요.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곁눈질로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지만 오늘은 그분들에게 용기를 얻습니다. 나라고 못할게 뭐람.
양말을 벗고 낙엽 위에 한 발을 가만히 올려놓습니다. 부스락- 또 한발, 부스락-. 따듯한 햇살을 가득 머금은 낙엽은 적어도 차갑지는 않아요. 이대로라면 열 걸음은 걸어볼 수 있겠는데요. 발가죽 아래로 마른 흙, 작은 돌들, 바삭한 낙엽이 느껴집니다.
'솔잎에 찔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돌을 잘못 밟아 티눈이라도 생기면?'
'파상풍 균도 있을 텐데. 아냐, 유익균이 더 많을 거야.'
별별 생각이 꼬리를 물지만 발에서 느껴지는 촉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 좀 더 걸어봅니다. 한걸음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날카로운 것에 다치지는 않을지, 땅의 온도는 어떤지 모든 신경이 발바닥에 집중됩니다. 낙엽은 따듯하고, 흙길은 까끌하고, 눈이 녹아 검게 젖은 흙은 차갑기보단 시원합니다. 능선을 넘어 응달에 오자 이 따듯한 날에도 녹지 않은 눈이 있네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부작사부작 밟아봅니다. "으이크- 이건 아니다." 순식간에 사라지려는 발바닥의 감각을 부여잡고 따듯한 볕 아래 낙엽에 가서 발을 문댑니다. "아이고- 살겠다."
※밤나무가 있는 곳, 뱀이 출몰하기 쉬운 계절이나 장소에선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걷는 내내 발바닥의 감각 말고는 아무것도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어요. 이렇게 발바닥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열 걸음만 걸어보자 했던 것이 걸을수록 자신감이 붙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어싱을 하는 순간에는 오직 땅과 나만 존재했어요. 대지의 기운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행복감과 개운함이 한참을 감돌았죠. 지구가 언제까지 인간을 견뎌줄까 궁금했는데, 애초에 지구는 화가 나있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기적이고 보잘것없는 저에게도 내어주기만 하는걸요.
다시 운동화를 신으려고 발바닥을 들어보니 생각보다 멀건 합니다. 이렇게 되면 더욱 어싱의 매력에 빠질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