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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헷 Jan 09. 2021

밥; 하루 세 번의 가장 행복한 수행

 

 

 이곳 치유센터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꼽으라면 하루 세 번 돌아오는 식사시간입니다. 몸과 만나는 시간, 자연과 만나는 시간, 우주와 만나는 시간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있지만, 이 모든 시간을 제치고 아직까지는 밥이 단연 일등이네요. 어쩌겠어요. 아직도 미각이 주는 쾌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미생인것을...


 하지만 이곳의 식탁은 쾌락을 선사하는 현대인의 밥상과 다른 몇가지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이 특이점을 들어 이곳에서는 식사조차 수행이라는 , 고로 저는 수행을 즐기고 있는거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네요. (흠흠)


  

첫째, 과식금지 


 

 식당에 들어가면 여기저기에 붙은 과식금지 팻말부터 눈에 들어옵니다. 과식이야말로 염증과 암 발생의 일등공신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다만 맛있는 음식 앞에서 그런 상식일랑  모른 척 하고 싶어질 뿐이죠.


 허나 이곳에선 사방에 과식금지 팻말이 붙어있으니 이것 참 모른척 하기도 난감합니다. 음식을 다시 뜨러 가는 것이 괜히 눈치가 보여서 한접시에 음식을 꽉꽉 채워오게 된다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먹을 때마다 '나 지금 배부른가? 과식 중인가' 묻게 되는 걸 보면 이것 꽤 효과적인 방법이네요. 저도 집에 가면 고속도로 스타일로 현수막이라도 걸어둬야겠어요. - 깜박 과식, 번쩍 저승 -




둘째, 자연그대로


 

 모든 식재료는 자연에서 취하며, 가능한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음식을 먹습니다. 서너가지 자연식 반찬과 함께 아침엔 과일 한 조각, 점심엔 비타민나무 열매, 저녁에는 밥 대신 죽이 제공됩니다. 오메가3가 풍부한 아마씨가루, 초콩, 낫또, 견과류는 매끼마다 빠지지 않습니다. 멸치 육수조차 쓰지 않는 철저한 채식입니다.


 조리방법은 3가지 정도로 추려집니다. 찌기, 데치기, 발효시키기. 암환자에게 치명적인 볶고, 태우고, 튀기는 요리는 일절 눈에 띄지 않습니다. 집에서는 '이거 먹어도 될까?'를 항상 체크하며 먹어야 했는데, 이곳은 그런 사념없이 오롯이 식사에만 집중할 수 있어 너무나 좋네요.




 셋째, 모래시계


 

 자리마다 30분짜리 모래시계가 있어서 식사를 시작할 때 모래시계를 뒤집어 둡니다. 평소라면 5~10분만에 다 먹어치울 양을 30분동안 늘여 먹으려니 이것이야말로 수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음식을 천천히 먹으려니 오래 씹을 수 밖에 없고, 오래 씹다보다 음식 고유의 맛들이 하나하나 고개를 듭니다.

 

 전에 한 친구가 자기가 참여했던 미각실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맛있는 도너츠도 한 조각을 잘게 나눠 20분 넘게 꼭꼭 씹어 미해 먹어보 한개를 다 넘기기도 힘들다는 겁니다. 그 실험을 저는 치킨에 적용해 보았는데 충격적이게도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소라면 1인1닭도 어렵지 않은 치킨이지, 콩알만큼 쪼개서 천천히 씹어먹자 기름맛, 특유의 닭냄새 때문에 도저히 맛있게 느껴지지가 않는겁니다. 평소엔 아무렇지 않게 씹어넘겼던 검붉은 속 핏줄들도 왠지 더 역겹게 느껴졌습니다. 이러다간 아까운 치킨을 다 버릴 것 같아 양념을 듬뿍찍고 치킨무와 콜라를 곁들여 '우적우적' 먹어치웠더랬죠. (하... 미생이여.)



  헌데 이 곳에서 제공되는 자연에서 온 음식들은 어쩐지 꼭꼭 씹어먹을 수록 제 맛을 더 뽐냅니다. 푹 익힌 비트는 자색고구마와 무의 중간맛이 나더군요. 빨리 씹어 삼킬 땐 영 맹한 맛이지만 가만히 씹다보면 비트만이 가진 풍미가 슬그머니 올라와 '나한테 이런맛도 있딴다?' 하고 말을 걸어옵니다. 그동안 너무 강한 양념 때문에 베이스 역할만 해왔던 묵직한 자연의 맛들이 '니가 좋아하는 맛이 사실은 나한테서 온거야!' 하고 미각세포를 흔들어 깨우는 겁니다.

 


 찹쌀현미를 쪄서 소금을 살짝 가하면 고소함과 달큰함이 기가 막히게 어우러진다는 것, 쑥갓을 데쳐 으깬 두부와 버무려 먹으면 긋한 겨울 쑥갓이 한 층 더 싱그러워진다는 것도 식탁 위 모래시계 덕분에 알게 된 사실입니다.


 방금 저녁으로 먹고 온 잣죽에선 신선한 우유 맛이 났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아도 가끔 라떼에 들어간 우유의 고소함이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있는데 이런 잣죽과 함께라면 우유 없는 삶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아요.  


 

자연이 주는 풍요로움과 종사자들의 정성, 그리고 만식(慢食)의 노력의 더해져 하루 세번 가장 행복한 식사 시간을 누리고 있습니다.


 식탁에서 자연을 만나고 나를 만나니 이것이야말로 밥상머리 수행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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