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an 08. 2017

잠든 서정에 이름을 묻다_ 영화 <너의 이름은.> 리뷰

마흔네 번째 지난주




등급의 시절에 인연(因緣)을 논한다는 것


 일찍이 ‘좋은 삶’은 정해져 있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소위 ‘좋은 대학’에 입학한 뒤, 또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꾸준히 승진 가도를 달려감은 ‘좋은 삶’의 주된 궤적으로 알려져 왔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가 더 포함된다. ‘좋은 직장’에 입사할 즈음 ‘좋은 배필’을 만나 혼사를 치름이 그것이다. 그런데 다른 존재가 그어 놓은 삶의 길 중에서도 ‘좋은 상대를 만나는 일’은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다. 바로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는 없다는 본질적 속성 탓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좋은 삶’이 그 자체로 발전시킨 시스템에 결국에는 속박당하고 만다. 숫자를 비교해서, 등급을 부여한 뒤, 같은 등급 내에서만 짝이 될 수 있는 상대가 정해짐이다. 어떤 대차대조표는 슬프다. 이런 지경에서 누군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운명이니 인연이니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해보자…….


 분명 마음속에 품어왔지만, 오랜 시간 덮여 있던 감정이, 지난주, 더없이 아름다운 하늘빛으로 우리를 찾아왔다.




※ 마흔네 번째 「김태은의 지난주」에서는 영화 <너의 이름은.>에 대해 다루었습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는 분들은 읽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월하의 연분 혹은 무스비


父生母育(부생모육) 辛苦(신고)하야 이내 몸 길러 낼 제
公侯配匹(공후 배필) 못 바라도 君子好逑(군자호구) 원하더니,
三生(삼생)의 怨業(원업)이오 月下(월하)의 緣分(연분)으로,
長安遊俠(장안 유협) 輕薄子(경박자)를 꿈가치 만나 잇서

허난설헌의 「규원가」 중


 허난설헌의 「규원가」의 일부이다. 소식마저 끊어진 채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 남편을 그리움과 원망 속에서 기다리는 한 여인의 한과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¹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이 인연이 주어진 것이라 읊는다. 이토록 경박한 남편을 만난 것이 삼대의 업이자, ‘월하의 연분’이라 한다. 이 중 ‘월하의 연분’은 월하노인이 장차 인연이 맺어질 남녀를 빨간 실로 묶어 둠을 뜻한다고 전해진다. 중국 도교가 원형이라는 설이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에도 위 작품에서처럼 예로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믿음이 가장 강한 곳이 바로 일본이라 한다. 이는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의 무스비(結び·결연, “이하 ‘연결’의 의미로 사용합니다.”)로 표상된다. ²


* 결혼식에 주로 쓰이는 축의금 봉투로 오이와이부쿠로お祝い袋라고 하며, 무스비의 빨간 끈이 생활에 스며든 좋은 예라 할 수 있음


끈을 연결하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연결하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작품 중 할머니의 반복적인 주지가 아니더라도, 미츠하의 머리끈과 타키의 손목을 감싼 끈의 존재는 이 둘을 무스비 혹은 월하의 연분으로 매개한다. 그리고 꿈이 희미해질수록 멀어지는 것만 같은 두 사람이 언젠가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일본에서의 큰 인기가 설명이 되는 대목이다. 일반의 믿음에 기반을 두어, 이야기를 쌓아 올린 접근법이 주효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너의 이름은.>이 일본에서 받은 관심과 사랑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인연을 넘어, 정작 연출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아픈 기억으로 향한다.





시대의 아픔과의 무스비


 타키와 미츠하는 나이가 같은 고등학생이다. 기종에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기 있는 스마트폰을 쓰는 그야말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학생들이다. 하지만 둘은 멀리 있다. 이는 비단 지리적 괴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신사를 모시며 관련된 의식을 치르는 미츠하의 시골과 첨단의 도시 도쿄라는 차이는 비단 위도와 경도의 다름으로만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실상 두 사람의 시간도 약 3년이라는 간격으로 어긋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키는 살아있음을 그리고 미츠하는 죽음을 상징하는 가운데,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다. 왜 이렇게 멀리 있는 존재들이었을까?

** 영화 <너의 이름은.> 스틸컷


 2011년, 도호쿠 대지진이라는 엄청난 참사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했다. 하지만 연출자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영화를 통해, 동시대의 슬픔은 비단 그 아픔을 겪은 당사자의 일만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를 위해 대립적 배경을 각각 상징하는 두 주인공을 매개하기 위한 장치로 앞서 언급한 인연의 매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진이 일상이라는 일본이라지만, 2011년의 그 끔찍했던 기억은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을 공유하게 했다. 그리고 꿈처럼 희미해져 가는 기억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아파하는 일이 가능하게 하고 싶었던 연출자는 사랑과 인연 그리고 회복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치유에 나선다. 이는 영화 속에서 삶과 죽음이 구분되는 장소이자, 빛과 어둠이 경계를 이루는 시간인 ‘황혼(黃昏·twilight zone)’으로 표상된다. 결국, 두 사람은 시대의 아픔을 너머 결국 서로를 알아보며, 희망을 전해온다. 그런데 이상하다. 어째서 동일본 대지진을 TV와 인터넷을 통해서만 접한 우리에게도 유사한 울림을 주는 것일까?

 그렇다. 다시, 그 바다로 가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세월호와 무스비


 일본이 아닌 우리의 스크린에서 <너의 이름은.>을 마주한 이 땅의 관객들은 도호쿠 대지진이 아닌 세월호를 상기할 수밖에 없다. 영화 대사 중 “가만있으라”가 들려오는 순간, 관객석 전체를 울린 떨림을 기억한다. 특히 우리는 그 엄청난 비극에도 숨기거나, 다투거나, 우는 척을 지켜보느라 귀하디 귀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 마침 내일이 1,000일째 되는 날이라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의 시차인 3년과 유사한 시간이다. 세월호와 우리는 어떤 무스비로 이어진 것일까? 영화 <너의 이름은.>은 우리에게 짧지만 진중한 반성문과 연대의 의미를 동시에 묻고 있다.


***









묻혀있던 서정의 선을 건드리는 영화


 인기 있는 영화 리뷰 작법에 관해 대강 아는 바가 있다. 상징들을 찾아 해석해내어, 읽는 이로 하여금 일종의 깨달음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수반된다. 하나는 필자의 역량 부족이라는 예정된 한계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이 보지 못한 것을 나는 보았다’는 식의 어쭙잖은 과시가 부끄러운 탓도 있다. 그런데 신카이 마코토의 신작 <너의 이름은.>에서는 이 같은 걱정이 다소 줄었다. 이 작품은 내재적 의미에의 천착에 이르지 않은 채, 그 감상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전하는 작품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우리가 정해놓은 인연의 범위가 너무 좁아, 이제 그것을 인연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지경이 된 탓도 있겠다. 결국, 우리도 익히 알고 있었으나, 오랜 시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빨간 실의 낭만과 서정을 영화 <너의 이름은.>이 툭 건드리며 이름을 물어온다. 당신의 인연은 그 이름이 무엇이냐고…….


**** 영화 <너의 이름은.> 스틸컷



참고

¹

 - 천재 학습백과, 허난설헌 「규원가」 전문 및 해석

 -  koc.chunjae.co.kr/Dic/dicDetail.do?idx=21339


²

 - 나무위키 중 “운명의 붉은 실” 항목 중

 - namu.wiki/w/운명의%20붉은%20실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네이버 영화 중 <너의 이름은.>

 -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0198


*

 - 트위터 “동양풍 잡학봇” 계정

 - twitter.com/oriental_bot/status/613953196071845888


**, ****

 - 영화 <너의 이름은.> 공식 홈페이지 중 갤러리

 - your-name.kr/web/mobile/sub05.html


***

 - 세월호 1,000일을 기억하는 11차 집회 중 통인동 커피공방의 현수막

 - 직접 촬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