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아홉 번째 지난주
말들이 횡행한다. 반드시 누구랄 것도 없이…. 명백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터인데, 그 가운데서도 기이한 말들은 새어 나온다. 기이한 말들은 잘 팔리기도 한다. 어쨌건 독자는 넘쳐나니까…. 그래서일까? 기이한 말들은 지면에서 활자가 되어서도 당당하다. 활보한다. 다시 이 시절이 왔구나 한다. 묻고는 싶다. 자꾸 주적을 찾는 사람이 주적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까? 정당을 잉태한다는 의식은 <에일리언>으로부터 비롯함입니까? 어떤 혈기왕성함은 어째서 범죄를 무마할 수 있습니까? 자연 미인의 자연이 횟집에서 말하는 자연산의 그 자연이 맞습니까? 비난하지는 않으련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그저 잠시 피로를 쫓아내고는 싶다. 다행히 곁에는 아름다운 문자들이 있으니까…. 시집(詩集)이 있으니까…. 그런데 머릿속의 시절과 시집의 언어가 자꾸만 겹친다. 내칠 수도 던질 수도 없는 미세한 먼지마냥, 시절은 거부를 비집고 고개를 들이밀더니 이내 시(詩) 속으로 관입한다. 폭력! 시절이라는 폭력에 희미한 저항이 주저앉는다. (그대는 굴복하지 말기를 나에게는 도리가 없다) 그저, 겹쳐진 시들을 따로 떼어내 온다.
그대의 표정 앞에
황지우
뉴욕, 흐림, 0℃, 레이건 국방비 증액
런던, 짙은 안개, 4~2℃, 무가베, 엔코모 비난
파리, 비, 2℃, 미테랑 무기 판매 결정
본, 눈, -5℃, 波 계엄 위반자 14만 5천명
모스크바, 폭설, -5∼-11℃, 행정 조직에 黨 통제 중요
동경, 흐림 11∼5℃, 波 수천 명 검거
리오데자네이로, 폭우, 37∼20℃, 美, 엘살바도르 파병 부인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에 오줌 싸려는 나의 포즈를 가로등이 등뒤에서 길게 내 이마 앞에 때려눕혀 논다. 섬뜩 놀라며 멈춘 나는 섬뜩 놀란 체하는, 그런 몸짓을 하는 그 놈을 노려본다. 그놈에게 질질 갈기면서, 좌우로 흔들면서, 부르르 떨다가 탈탈 떨면서, 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한다. 못살아 못살아. 들어가면 아내에게 소리지를 거다. 여보, 우리 꺼지자. 南美로, 南極으로, 우리의 對庶地로. 어디든!
현실: 꼼짝 못 함. 체형 부동자세. 경제: 빚더미. 교육: 무지몽매. 예술: 신선한 거품의 OB맥주. 아, 삶: 입구멍. 똥구멍. 오줌 구멍만 뚫려 있음. 여기저기에 핀포인팅. 종교: 없음.
불쌍한 지구. 불쌍한 폴란드.
불쌍한 태양계. 불쌍한 20세기말.
그리고 끝으로 불쌍한 이 時空 어디서
눈이 오려는지
호남 산간 내륙으로 불연속 전선이 다가간다
¹
마음에 빚진 바 없이 어찌 시를 쓰겠나! 시선과 동선만이 이동할 뿐, 시인의 마음은 내내 부채의식으로 가득하다. 1980년 봄의 비극 앞에서 불가피한 방관자로 살아간 시인은 외국의 상황을 살피는 것으로 잠시 도피하였다가, 이내 술에 취해서는 가로등과 맞설 뿐이다. 무기력의 절정에 잠시 탈출을 모의하지만, 달아날 곳도 살아낼 힘도 없이 그저 가련히 바라볼 뿐인 것이다.
이 시는 지구촌 곳곳의 날씨를 읊다가, 호남 산간 내륙에서 끝이 난다. 당도할 일도 없는 외국의 날씨를 살핌은 지금 살아가는 이곳의 불만과 연결된다. 하지만 날씨와 함께 거론되는 세상사의 혼란은 달아날 곳조차 마땅치 않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저들의 엄포보다도 못한 노상방뇨를 갈길 뿐이었다. 겨우 탈탈 털어낸 시인은 아내의 면전에 이르러 도망을 선언하리라 결심한다! 하지만 이내, 그대의 표정 앞에 와르르 무너진다. 기실 결심이랄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봐라! 어차피, 어디에도 못 간다. 체형은 자연스레 부동자세가 되고, 통장을 살필 것도 없는 독촉들은 선연하다. 열린 구멍으로 맥주의 출입만이 허락된 여생은 건조하게 바라보던 세상사를 이제 처량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다 불쌍하다. 지구도 폴란드도 태양계도 20세기 말까지도 ‘불쌍’의 절정에는 눈이 내리는지, 불연속 전선의 행방에서 시선은 멈춰 선다. 다시 그곳이다. 부채의식의 진원지였다. 달아날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다. 결국, 현실을 해체하고자 하는 욕망은 괜히 만만한 시로 향한다. 본 지면을 통해서 그대로 옮길 수 없으나, 실지 시집에서는 글자를 키웠다가 줄였다가, 굵게 하였다가는 가늘게 하는 등 할 수 있는 최선의 파괴를 일삼는다. 그뿐이다. 그런데 낯설지 않다. 나는 지난주의 뉴스를 살핀다.
생의 위태로움을 초등학교 앞 문구사에서 알아버렸다. 그곳에서 단돈 500원 하는 칼이며 가위이며 컴퍼스 따위에도 우리는 위태로웠다. 물론 문방구들은 잘못이 없고, 태연히 매대에 누웠다가 인연을 만나면 떠나갔다. 위험한 것들도 항시 위험하지만은 않다. 심지어 지난주의 뉴스에는 미사일이며, 항공모함이며, 철없는 군주의 얼굴이랄 것이 반복적으로 비추었다. 레이건이며, 미테랑과 같은 이름자를 트럼프며 시진핑으로 대체하여 읽기가 가능했던 이유 일지다. 레이건보다 훨씬 혈기왕성한 미국의 그 존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항공모함을 입으로만 정박시키며, 한 국가의 안위를 겁박해왔다. 지구의 날씨는 인간이 정한 단위 안에서만 변천하고, 어차피 전투복은 방수가 된다는 굳건한 믿음 탓인지……. 마침 우리의 혼란도 정돈되지 않은 즈음, 시 속의 시절에 살인을 저지른 자가 떳떳하게 회고록을 펼쳐낸 즈음, 우리를 제외한 채 우리의 문제를 아무렇게나 난도질당한 피동적 주체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저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마치 시인처럼……. 물론 우리에게도 중차대한 관심거리는 있다. 확성기 소리가 들려온다.
홀린 사람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²
지금 누가 홀렸나? 아무도 홀리지 않았다. 자신이 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없다’기보다 ‘있을 수 없다’. 그저 우리는 홀리지 않기 위해, 홀리라고 만들어 놓은 정보를 뒤적일 뿐이다. ‘홀린다’함은 본질이 아닌 껍데기, 즉 이미지에 현혹됨일진대, 이미지가 아닌 정치가 어디 있겠나…. 이미지도 본연과 닮아 그 생명력을 얻었겠거니 하련다. 그럼 대체 왜 이 시를 가져온 것인가?
비단, 문제시 삼고자 함은 ‘깨어있음’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종종 ‘깨어있음’은 ‘열정’과 혼동을 일으킨다. 이는 ‘깨어있음’의 방향이 온전히 타자로만 향하며 발생하는 비극이다. 딱 그만치, 혹은 더 크게 ‘깨어있음’은 ‘나’를 향할 일이다. 실천은 어렵지 않다. 나 또한 ‘홀린 사람’ 중의 하나일 수 있음에 대한 경각심을 놓지 않으면 된다. 내가 ‘홀린 사람’일 수도 있음을 끊임없이 의심하면 되는 일이다.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모두가 홀렸거나 아무도 홀리지 않은 선거의 시절이다. 마침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피의 꽃
정희성
동학폭동, 3·1폭동
4·3폭동, 5월 폭동……
조정은 언제나 우리를 폭도로 규정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폭동은 안녕하다
저들은 입만 열면 말한다
혁명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혁명은
용납받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계급은 씨앗처럼 안녕하다
부릅뜬 씨앗처럼
살진 돼지에게는
혁명이
어느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지만
피의 꽃은
하루아침에 피어나지 않는다
³
언어는 규정한다. 이름을 지음은 좋은 예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와 몸짓을 ‘폭동’으로 부를 것인가, ‘혁명’으로 부를 것인가의 문제는 일반의 의지와는 무관하였다. ‘일부 몰지각한 소수가 일으킨 폭동’은 역사 속에서, 밤사이 사건·사고처럼 치부되었다. 그렇게 안녕하다. 심지어 저들은 ‘혁명’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인은 말한다. ‘혁명’은 용납받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씨앗처럼 안녕한 계급에의 항거를 위해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살진 돼지에게나 혁명은 갑자기 뜨거워진 발열체일지 모르겠으나, 피를 토하며 외치는 자들의 시간은 갑작스러울 수 없다. 피로 자라난 꽃이 쉽게 피어날 수 없음을 시인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노동하는 자를 노동자라 부르면 싫어하는 이상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지금 광화문 부근에 어느 높은 곳에 올라있다. 폭동 중인가? 혁명 중인가? 그 이름이 무엇이건, 시인의 예기(豫期)처럼, 역사 속에 숫자로 기억할만한 사안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또 안녕할 모양이다. 물론 우리는 심지어 촛불로 ‘혁명’을 해내었다. 노고가 많았다. 하지만, 아름답게 타오르던 촛불만이 혁명이 아니고, 대통령씩이나 되는 자를 향해야만 혁명이 아닐 지다. 우리는 우리의 생계를 물고 늘어지는 온갖 사태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지난주, 비정규직과 노동악법 문제는 ‘주적’, ‘회고록’, 그리고 차마 입에 담기도 거북한 어떤 것의 뒤에 가려졌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금만이라도, 아주 조금만이라도 계급 앞에 내 밥그릇 저당 잡히지 않는 시절의 도래이기를 바라본다. 시인은 말했다. 피의 꽃은 갑자기 피지 않는다고…….
쏟아지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거대하다. 시절의 닮음으로 시 몇 편을 소환했으나, 여전히 감당하기에 버겁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잠시 시집을 덮는다. 마침 시는 시집에만 갇혀있기를 거부하여, 대중문화의 곳곳에 슬그머니 침투하였다. 그중에도 동 시절을 살아가는 가수의 노랫말은 크나큰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의 시선에서 우리의 시절을 바라보게 한다. 학교에서, 광장에서 흩어지면 각자의 길을 가야 하지만, 아직도 목소리는 남아있고, 나는, 혹은 친구는, 혹은 나와 친구 모두는 갈 곳이 없다. 가슴 설레기엔 나이를 먹은 아이의 마음마저 갈 곳이 없다. 그러니 청춘의 허무 앞에, 전쟁이며, 대선이며, 권리를 위한 투쟁은 명백히 우리의 문제임에도 닿지 않는 거리에 있다. 그저 나만 여기 혼자 남아,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다. 잔인한 사월이다.
잔인한 사월
브로콜리너마저
거짓말 같던 사월의 첫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는데
왠지 나만 여기 혼자 남아
가야 할 곳을 모르고 있네
떠들썩하던 새로운 계절
그 기분이 가실 때쯤 깨달을 수 있었지
약속된 시간이 끝난 뒤엔
누구도 갈 곳을 알려주지 않는 걸
나 뭔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나의 지금은
깊어만 가는 잔인한 계절
봄이 오면 꽃들이 피어나듯
가슴 설레기엔 나이를 먹은
아이들에겐 갈 곳이 없어
봄빛은 푸른데
⁴
참고
¹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문학과 지성사, 1983
²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³
-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 비평사, 1991
⁴
- 브로콜리너마저, 『잔인한 사월』, 웨스트브릿지엔터테인먼트, 2012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2017년 4월 21일 자, “누구를 찍을까?”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0421220200013&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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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뉴스룸, 이한주 기자, 2017년 4월 20일 자, “칼빈슨호 거짓 행방 논란…"트럼프, 북 허세 따라 했다"”
- news.jtbc.joins.com/article/article.aspx?news_id=NB11457506
**
- fee.org/articles/the-right-to-be-a-minority-of-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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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합뉴스, 박동주 기자, 2017년 4월 14일 자, “'정리해고, 비정규직 철폐!'”
- 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0414307800013&fro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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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1월 28일, 14차 촛불 집회, 직접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