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일곱 번째 지난주
본래 ‘쓰다’는 ‘스다’였다. ‘쓰다’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5세기로 알려져 있다. 17세기 무렵까지 ‘스다’와 ‘쓰다’는 공존하지만, 16세기 이후 같은 낱자를 가로로 조합해서 겹 낱자를 만드는 이른바 ‘각자병서’가 국어 표기에 다시 사용되면서 ‘쓰다’가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¹ 표기의 차원뿐 아니라 음가(音價)의 영역에서도 그 변천의 근거를 읽을 수 있다. 고대 국어에서 예사소리(平音)뿐이었던 한국어 말소리가 전쟁이나 기아 상태와 같은 사회적 격변기를 거치며 점차 된소리나 거센소리로 강음화(强音化)되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² 이 같은 작동 속에 ‘스다’도 자유롭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스’지 않고, ‘쓴’다.
새기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는 양, 그렇게 눌러서 '써' 왔다. 이렇듯 '쓰는 일'은 힘이 들어가는 일이다. 허투를 수 없다. 그중에서도 하나의 '쓰는 방식'을 생각한다. 바로 ‘시’이다. 유독 이 ‘시’라고 하는 것은 그 분량에 제약이 없되, 일반적으로 작은 메모지에 적어 전달할 수 있을 만치의 짧은 글로 새겨진다. 양으로만 따지자면 가냘픈 이것이 제 모국어의 언어적 아름다움을 빌어, 인간의 마음을 압축하며, 당대의 사람들과 교감해온 오랜 시간은 그 어떤 '쓰인 흔적'보다 깊다. 그렇게 생각한다. 이와 같은 단상은 지난주, 어느 유명한 옛 시인의 전집이 완간된 사실로부터 말미암는다. 일견 그 시들은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렇기에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어떤 그늘을 남겼다. 나는 그 빛과 그림자를 분리할 수 없다고 믿고 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지,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가 들려왔다. 되짚어 본다.
"미당 문학은 비언어를 포함해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와 역사가 아닌 예술의 관점에서 얼마나 훌륭한지 봐 달라."
- 『미당 서정주 전집』 완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편집위원 이남호 고려대 교수 발언 중 ³
지난주 은행나무 출판사가 『미당 서정주 전집』 전 20권을 완간했다. 완간을 기념하는 기자간담회에서 편집위원인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위와 같이 말했다. 학식 높은 교수님에 반(反)하려니 머뭇거려지기도 하지만, 이는 내가 알고 있던 문학이나 시의 일과는 거리가 있기에 한 마디만 거든다.
시야말로 사람의 일이라, 사람이 사는 모습과 그 마음들의 생김을 노래하는 일이 가장 주된 소명으로 알고 있다. 더불어 이것이 소시민의 삶을 노래하는 이른바 ‘민중문학’의 정의에만 국한하지는 않는다고 자신을 변호한다. 그저 문학에 관한 나의 믿음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으로부터, 인간이라는 한계에 부닥쳐 푸닥거리는 처절함까지 그 모두를 담아내는 영역 안에 있다. 그런데 이는 읽는 이에게 명백한 ‘영향’을 행사한다. 내가 아닌 타인의 감정과 행위가 오롯이 담긴 문학이라는 것을 접할 때면, 부득불 나의 감정과 행위와 견주며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겠다. 특히나 그것이 동시대 혹은 역사의 주요한 시점들에 등장했다면 그 무게는 가벼울 수 없다.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
구국대원
구국대원의 푸른 영혼은
살아서 벌써 우리게로 왔느니
우리 숨 쉬는 이 나라의 하늘 위에 조용히 조용히 돌아왔느니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 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 중 ⁴
미당의 작품을 역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름을 가리고 읽는다든가, 아예 후대에 위와 같은 작품만 솎아내어 전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미당의 몸과 미당의 시를 분리할 수 없듯, 역사의 주요 지점마다 제 지닌 재능으로 제 입신과 양명에 시의적절하게 시를 끌어들이던 행위 또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무겁다는 시를 빌었음에 모국어를 공유하는 이들이 느꼈을 좌절의 무게는 또 어쩌란 말인가!
처음으로 한강을 넓고 깊고 또 맑게 만드신 이여
이나라 역사의 흐름도 그렇게만 하신 이여
이 겨레의 영원한 찬양을 두고두고 받으소서.
- 서정주,「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는 송시」 중 ⁵
미당은 부끄러운 이름이어야 한다. 그 이름으로 문학상을 수여하고 전집을 출판할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빼어난 재능을 아무렇게나 전횡한 부끄러움을 물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혹자는 미당의 문학이 수려하기에 면죄의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할수록 힘주어 물어야 한다. 무려 미당의 글이기에 그렇다. 그것이 지닌 힘과 영향을 반추한다면 더욱더 강하게 그와 그의 작품에 부끄러움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시를 쉽게 알고 시를 쉽게 처분함이 잘못일 수 있음을 후대의 모국어 사용자에게 전할 수 있을 일 아닌가! 그러니 이 쉽게 씌어진 시들에 대해 부끄러움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무거운 시를 쉽게 써먹은 부끄러움을 물어야 한다! 이렇게 강하게 성토하면, 조금 조심스러운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 서정주, 「자화상」 중 ⁶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씌어진 시(詩)
윤동주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
대학(大學)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⁷
정작 가장 시를 어렵게 쓴 시인은 자신의 시가 쉽게 쓰였다며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른다. 세상은 참 모르겠다. 그저 사실을 알아버린 자만 부끄럽다. 마침 시인은 시인이란 슬픈 천명임을 알아버렸다. 그리하여 여전히 남의 나라를 살아가는 시인은 부끄럽다. 하지만 시인은 끝까지 희망을 노래한다. 그리고 시인이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대처럼 아침이 왔다. 시인이 내민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덕분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침 올해는 윤동주 시인 탄생 100주기를 맞는 해이다. 시대 앞에 부끄러워하던 영원한 청년의 삶을 한 편의 어렵게 씌어진 시로 돌아본다. 그리고 쉽거나 어렵게 쓰인 시들을 읽으며 다시금 ‘쓴다’는 일을 생각한다. ‘쓴다’는 일은 ‘기능’ 이전에 ‘정신’으로부터 비롯함을......
참고
¹
- 우리말샘, <쓰다> 항목 중
- https://opendict.korean.go.kr/dictionary/view?sense_no=481180
²
- 천소영, 「된소리 발음과 극단적 표현」, 국어생활 논단, 새국어생활 제16권 제4호(2006년 겨울)
³
- 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2017년 8월 21일 자, “"서정주 문학은 최고의 문화유산…읽고 나서 비판하라"”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8/21/0200000000AKR20170821087600005.HTML
⁴
- 위키백과, <마쓰이 오장 송가> 항목 중
-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C%93%B0%EC%9D%B4_%EC%98%A4%EC%9E%A5_%EC%86%A1%EA%B0%80
⁵
- 위키백과, <서정주> 항목 중
- 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A0%95%EC%A3%BC
⁶
- 서정주, 「자화상」, 『화사집』, 남만서고, 1941
⁷
-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및 *
- 경향신문, 1947년 2월 14일 자, “쉽게 씨워진 詩(시)”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publishDate=1947-02-13&officeId=00032&pageNo=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