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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Sep 17. 2017

과학의 시

여든 번째 지난주




다행이다. 시가 있다.


 사람을 ‘앓던 이’에 비유함은 무례한 처사겠다. 그리하여 최소한의 예의를 다하려니, 그 또한 쉽지가 않다. 무려 22일 동안, 그것도 무려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에 임명된 이로부터 “지구 나이는 신앙적으로 6000년”과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던 그가 지난주, 결국 물러났다. ‘앓던 이’보다는 그저 ‘다행’ 정도로 해두겠다. 다행이다. 그런데 유독 새 정부 들어, 과학과 관련된 부처의 인사에서 잡음이 많이 들려온다. 과학적인 일일까, 비과학적인 일일까? 그저 우연이었기를 바라본다. “우리 과학계 전반을 돌아보자”라는 그럴듯한 선언을 내어놓을 입장에 있지 않은 관계로, 전할 수 있는 말들을 주워 담는다. 마침 사랑하는 영화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온다.


"시인이 왔어야 했어. (They should have sent a poet)"

 

 영화 <콘택트> 중 엘리 애로웨이(조디 포스터 분) 박사가 우주의 모습을 목도하는 장면에서 탄복하며 내뱉은 대사이다. 우주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앞에 이를 그나마 온전히 전달할 언어는 시의 그것이라 여겼음 직하다. 하지만 이 대사를 과학의 일과 시의 일을 구분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나는 조금 불만스럽다. 차라리 이리도 다른 과학과 시가 함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음에 주목한다. 마침 우리의 시 중에서도 과학의 원리와 능히 통용하는 언어들이 있다. 지난주 다행스러운 일이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마음의 여유를 찾는 의도에서 이 과학의 시들을 불러 모은다. 이 시들은 함부로 지구의 나이를 깎지 않는다.









진화론과 「야채사(野菜史)」


야채사(野菜史)
                                         김경미

고구마, 가지 같은 야채들도 애초에는
꽃이었다 한다 
잎이나 줄기가 유독 인간 입에 달디단 바람에
꽃에서 야채가 되었다 한다
달지 않았으면 오늘날 호박이며 양파들도 
장미꽃처럼 꽃가게를 채우고 세레나데가 되고
검은 영정 앞 국화꽃 대신 감자 수북했겠다

사막도 애초에는 오아시스였다고 한다
아니 오아시스가 원래 사막이었다던가
그게 아니라 낙타가 원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원래 낙타였는데 팔다리가 워낙 맛있다 보니
사람이 되었다는 학설도 있다

여하튼 당신도 애초에는 나였다
내가 원래 당신에게서 갈라져 나왔든가

¹


 자칫, 흙 인형이 우리의 시작이었다는 이야기가 더 시적으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동화적이지 않은가? 동화를 폄훼하고자 함이 아니라 무릇 시라면, 인간의 근원을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였으면 한다. 그러자면 인간의 변화상이나, 인간이 영향으로 어떻게 세상이 변하여왔는지를 탐구하는 태도가 더 적절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흙 인형이건, 홍수 난 지구를 유영하던 배 위의 인간이며 동식물이 그 시작이라고 쉽게 인정해버림은 시의 일을 무색하게 한다고 나는 믿는다. 「야채사(野菜史)」를 보자. 시는 당장 내가 먹는 것부터 이것이 어쩌다 이 모습으로 우리 앞에 왔는지를 따진다.  


 사실 이는 슬픈 이야기일 수 있다. 언젠가 인간의 잔혹한 욕심으로 상아 없는 코끼리가 태어난다는 아픈 소식을 접한 기억이 난다. ² 그럼에도 개입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서 충실하게 관찰한 성과마저 무의미하게 취급할 수는 없겠다. 꽃이 아닌 달디 단 먹을 것으로 우리 앞에 놓인 고구마며 가지를 보고, 지구상의 사태가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발견하지 않는가! 시는 안주하지 않고, 나아간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떠올리고, 낙타에서 사람을 본다. 물론 진화론에서도 낙타와 사람의 거리는 멀 것이다. 하지만 시는 과학의 일을 시의 방식으로 탐구하며 결국 둘이 별개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물론 그러다가 ‘불쑥’ 당신이 떠오른다. 시는 가끔 ‘불쑥’ 앞에 대책 없다. 이해를 바란다. 


*





프랙털 이론과 「가을 거울」


가을 거울 
                                         김광규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였습니다
조그만 물거울에 비치는 세상
낙엽의 어머니 후박나무 옆에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칩니다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갈잎들 적시며
땅으로 돌아가는 어쩌면 마지막
빗물이 잠시 머물러
조그만 가을 거울에
온 생애를 담고 있습니다

³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에른스트 헤켈의 ‘발생반복설’은 훗날 헤켈이 ‘발생도’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과학계에서 폐기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우주의 존재들이 닮아있음에 관한 연구만큼은 아직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어떤 부분과 전체는 닮아있다. 마침 이를 ‘프랙털 이론’이라 한다. 일정 기간의 날씨 패턴은 긴 주기의 날씨 패턴과 닮았으며, 고사리 이파리를 들여다보면 같은 모양의 구조가 무수히 모여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느 부분을 잘라도 전체와 닮았으면서 끝없이 반복되는 성질을 지닌 것을 ‘프랙털’이라 한단다. ⁴


 가을의 거울은 가을비 추적추적 내리고 난 뒤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후박나무 잎이다. 그 누렇게 바래고 쪼그라든 잎사귀가 거울이 된다 하니 신기하다. 들여다보니 옴폭하게 오그라진 갈잎 손바닥에 한 숟가락 빗물이 고여 있다. 그 빗물, 아니 가을의 거울에는 내 얼굴과 우리 집 담벼락 그리고 구름과 해와 하늘이 비친다. 가을비가 땅으로 돌아가기 전,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거처는 지천으로 굴러다니는 낙엽들이다. 그리고는 조그만 가을 거울이 되어서는 온 생애를 담는다. 그 조그마한 가을의 거울에 온 가을이 담겼다. 작은 가을 낙엽과 가을비는 그 자체로 가을이 되었다.


**





상대성이론과 「질투의 나의 힘」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간은 하나가 아니다. 이편에서 본 시간과 저편에서 본 시간은 다를 수 있다. 관찰하는 나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만히 있는 내가 떠나가는 너를 보면, 너는 인지할 수 없으나, 너와 너의 것들이 나의 시선에서는 함께 멀어져 간다. 너는 그저 창밖의 나를 응시하거나, 외면할 수 있다. 그러던 내가 갑자기 너를 쫓는다. 너와 같은 속도가 되어 너와 너의 모든 것과 나의 속도를 맞춘다. 이제야 겨우 속도를 맞추었으나, 한번 떠나간 연인은 대체로 다시 떠나간다. 그런데 타인이 아닌 내가 시간을 지나 예전의 나를 바라본다면 어떨까? 역시 관찰자의 상태는 같지 아니할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흘렀다. 책갈피의 악력이 줄어들며 떨어뜨린 종이는 나를 청춘의 시간으로 데려간다. 돌이켜보니 마음속에 어찌나 많은 공장을 세웠던지 기록이 한량없다. 머뭇거리는 나의 청춘을 본다. 마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만 같다. 청춘이던 나는 연신 탄식만을 뿜어낸다. 청춘을 보낸 저녁거리들을 두고 내 청춘들을 세워둔 채 신기한 양 바라본다. 그런데 아무도 청춘이던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제야 보인다. 내가 품었던 희망이라는 것이 실은 죄다 질투였음을... 지금의 나는 이를 깨닫고 다시 기록을 남긴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음을..  이 뒤늦은 기록도 상대적인 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









구조 이성질체와 「구조와 성질」


 정확히 이름하자면 ‘과학의 시’라기보다는 ‘과학 이론으로 다시 읽는 시’쯤이 되겠다. 그럼에도 굳이 시인들이 과학을 염두에 두어 시작(詩作) 활동을 한 양 ‘과학의 시’라 이름 지음은 과학의 일이건 시의 일이건 결국 모두 우리의 세상을 비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전혀 의도가 없었던 시에서도 과학적 시선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작위(作爲)의 정도가 크게 느껴진 독자분들께는 양해를 구한다.


 다만, 우리에게는 좋은 구조가 필요하다는 점만큼은 힘주어 전하고 싶다. 서두에 언급한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는 무려 서른 명에 이르는 이들이 거절하고 난 뒤의 인물이라 한다. 우리네 과학계라는 것의 구조가 그다지 건실하지 않은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화학에서 분자의 구조가 달라지면 성질도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하며 이를 ‘구조 이성질체’라 부른단다. ⁶ 우리의 과학계도 구조를 개선하면 그 성질이 나아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마침 가져온 시는 좋던 구조가 나쁘게 된 것인데. 또 작위가 발생한 듯싶다. 다시 양해를 구한다.


구조와 성질
                                         임승유

창문을 그리고
그 앞에
잎이 무성한 나무를 그렸다

안에 있는 사람을 지켜주려고

어느 날은

나뭇가지를 옆으로 치우고
창문을 그렸다

한 손에
돌멩이를 쥐고






참고

¹

 -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비, 2008


²

 - 중앙일보, 홍주희 기자, 2016년 11월 27일 자, “코끼리 밀렵의 비극…상아 없이 태어나는 코끼리 급증”

 - http://news.joins.com/article/20932829


³

 - 김광규, 『시간의 부드러운 손』, 문학과 지성사, 2013


 - 네이버, 네이버 지식백과, 용어해설, 한경 경제용어사전, ‘프랙털(fractal)’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064823&cid=50305&categoryId=50305


 -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91


 - 위키백과, “이성질체” 항목 중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C%84%B1%EC%A7%88%EC%B2%B4 


 - 임승유, 『아이를 낳았지 나 갖고는 부족할까 봐』, 문학과 지성사, 2015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미국 항공우주국(NASA), 갤러리, "Swirling Landscape of Stars"

 - https://www.nasa.gov/multimedia/imagegallery/image_feature_2083.html


 - WebMD, Maryann Tomovich Jacobsen, MS, RD 리뷰, 2016년 7월 28일 자,  "12 Powerhouse Vegetables You Should Be Eating"

 - http://www.webmd.com/diet/ss/slideshow-powerhouse-vegetables


**

 - Mostnature.com, NATURE WATER DROP RAIN DEW FALL GOLDEN LEAF PHOTOGRAPHY AUTUMN DUAL MONIOR

  - http://mostnature.com/nature-water-drop-rain-dew-fall-golden-leaf-photography-autumn-dual-monitor-background/


***

 - mygodshot.com, Terry Waite, 2017년 1월 26일 자, "A Patient Man By Sam"

 - https://mygodshot.com/terry-waite-a-patient-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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