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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an 28. 2018

나를 돌아보는 시

아흔아홉 번째 지난주




혼자 있는 시간을 위하여     


 나도 모르는 나의 분주함을 보았다. 서슬 퍼런 냉기가 유난히도 날카롭게 파고들자, 내 안의 암호들이 수백만 년 전부터 각인된 기억에 깜짝 놀란 것이다. 생명을 지속하려는 작동은 전에 없이 파닥거렸다. 몸은 떨림으로 그 사실을 알려왔다. 한정된 에너지는 칼바람 너머로 뻗어가지 못했고, 이내 거리(距離)를 두었다. 그러자, 외기를 차단한 공간에 이르러서도, 선명한 혼자였다. 손에 든 기계에선 머나먼 인사들만 분주하고, 예정된 무탈함만이 넘실거렸다. 고백하건대, 좋아하는 간격이다. 애써 웃지 않아도 되었다. 표정은 느슨해진 근육에 맡겨버렸다.     


 마침 혼자 있기 좋은 시간이다. 나를 돌아본다. 다행히도, 도움이 될 만한 시들을 알고 있다.









나는 왜 상처만 기억하는가


인간론
                                         김경미 
   

  1     

옳지 않다
나는 왜 상처만 기억하는가
가을밤 국화 줄기같이 밤비 내리는데
자꾸 인간이 서운하여 누군가를 내치려보면
내가 내게 너무 가까이 서있다
그대들이여, 부디 나를 멀리해다오, 밤마다
그대들에게 편지를 쓴다

¹


 옳지 않으나, 그리 할 것이기에 미리 말해둔다. 상처만 기억할 것이다. 나를 기억한다는 일이 그렇다. 대체로 삐걱거린 행보들을 웃어넘기다가도, 아차 싶은 일들은 자꾸만 겹쳤다. 분명 모두에게 내릴 밤비도 내게만 유난하였다. 부끄러워서였는지, 자꾸만 내쳤던 타인들은 결국 나의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인간은 어김없이 서운해지고, 결국 나만 또렷해진 것이다. 인간의 한계가 나의 한계임을 알게 될 때, 상처만 기억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역시나 알게 되었다.      


 닿지 않을 편지의 수신인에게 전한다. 밤비 너머 우는 소리 들릴지 모른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부디 나를 멀리해다오. 


*






사랑했었다는 기억만이 나를 속도의 끝으로 밀어간다


등푸른 자전거
                                         이용한  


 내 입이 조그맣게 등푸른, 하면서 자전거가 떠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기억은 가끔 물방울의 오랜 윤회처럼 이미 흘러간 도계쯤에서 깜박거린다 왜 툭하면 체인이 벗겨지는 겁니까? 자전거포에 앉아서 내가 겨드랑이를 털 때, 수리공은 목장갑 낀 손으로 벗겨진 틀니를 추켜올리며 글쎄요, 했다 만드는 놈과 고치는 놈은 엄연히 다르지요, `엄연히`와 `글쎄요`의 간격 속에서 나는     

 비틀거렸다 한때 연탄가스로 죽을 뻔했던 내가 탄가루 날리는 역전에 광부처럼 앉아 있는 이것을 중독이라 하는 것인지, 느닷없는 절연과 전도 사이에서 감전된 이것을 미쳤다고들 하는 것인지, 역전다방 붉은 셔츠는 실밥 터진 눈으로 연방 웃음을 날리고, 누구나 다시 쓰고 싶은 자서전을 가지고 있어요, 나쁜 놈, 사기꾼, 엉터리, 멍청이, 변덕쟁이, 찢어버리고 싶은, 선량한 마초이거나 광포한 에고이스트     

 당신은? 이라고 묻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랑만으로 모든 걸 눈감아줄 수 있다면 벌써 난 눈멀었겠지만, 등푸른 자전거는 침울하고, 기억과 망각을 오르내리던 오랜 귀가들은 덜커덩,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길이나 핥아온 내가 길 밖에서 배울 수 있었던 건 쉽게 포기해버린 관계이다 차라리 숲의 관능과 구름의 변명을 믿어볼 일이다 언필칭 식자들이란 총을 든 사냥꾼 앞에서는 개처럼 엎드린다 그러나 가끔은 대로에서     

 당당히 교미할 수 있는 개처럼 살지 못했다는 것, 겨우 입을 벌리고 억지로 웃은 기억밖에 없다는 것, 추억이란 내 입술에 휘발하는 그녀의 조용한 술 냄새 같은 것이었고, 합병증으로 고생한 어머니의 희박한 숨결 같은 것이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죽을 때까지 물고기만 잡다가, 평생을 순댓국만 팔다가, 허구헌 날 곰인형 눈이나 붙이다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냥 죽는 것이다 누구도     

 죽을 때까지는 살아야 하는 저주를 뿌리칠 수가 없다 부단히 벗어나고자 했던 등푸른 자전거는 여전히 막차 끊어진 역사에 정거해 있다 생선인지 물고기인지 불분명한 날것을 삼키며 나는 식당의 어떤 비릿한 인생을 용납한다 목엣가시처럼 남은 어떤 연애도 꾸역꾸역 집어삼킨다 혀끝에 맴도는 자전거의 껍질과 무늬는 쉴 새 없이 똑딱 거리고, 나는 사랑했었다, 사랑했었다는 기억만이 나를 속도의 끝으로 밀어간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은 열두 살의 겁쟁이는 이제 마흔 살의 허깨비가 되어 앙상한 비탈길에 앉아 있다.    

²      


 이 시를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한 사내가 자전거를 타고 있다. 혹은 등푸른을 타고 있다. 또 혹은 자신을 타고 있다. 툭하면 체인이 벗겨진다. 자전거포에서 '엄연히'와 '글쎄요'의 간격을 발견하고는 비집고 들어간다. 나를 돌아본다.


 중독자, 미쳐버린, 나쁜 놈, 사기꾼, 엉터리, 멍청이, 변덕쟁이, 찢어버리고 싶은, 선량한 마초이거나 광포한 에고이스트는 사랑도 하였나 보다. 하지만, 그 기억 앞에서는 침울하다. 관계를 포기하며 살아왔다. 그도 그럴 것이, 당당하기는커녕 온갖 비겁으로 채색한 세상에서 믿을 것은 숲의 관능과 구름의 변명뿐이었을지 모른다. 겨우 입을 벌리고 억지로 웃어왔다. 그러자 추억은 그녀의 술 냄새와 희미한 어머니의 숨결만으로 남았다.


 추억까지 들춰본 사내는 중요한 사실을 주지한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 가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날아갈 것이 없을 것만 삶도 예외는 아니어서,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저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그저 날아가 버리는 순간까지 저주처럼 살아야 한다. 사내는, 시인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비릿한 인생을, 목에 가시처럼 남은 어떤 연애도 삼킨다. 어느덧 자전거 수리가 다 되었나 보다. 똑딱거리는 자전거의 껍질에 오른다. 달리면서도 생각한다. 사랑했었음을….


 달리면서는 그 생각뿐이다.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저주마저 날려버릴 양 속도를 끌어올리는 유일한 동력은 그저 사랑이다. 열두 살로부터 마흔 살에 이른 그저 사랑하며 달려온 등푸른 자전거는 이제 앙상한 비탈길에 앉아있다. 


**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기억하는가
                                         최승자


우리가 처음 만나던 그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을 뒤척였다.

³


 다른 이를 핑계 삼음도 습관이다. 다 나로 인해 비롯한다는 철학적 반성은 아니더라도, 나를 돌아보는 시선에 네가 자꾸 밟힘은 명백한 핑계다. 이를테면, 기억을 종용하는 일이 그렇다. 기억이나 하겠나?


 그러나 작금의 공허에 네가 완전히 무죄일 수 없다면, 너도 조금은 짐작할지도 모를 그 환희와 슬픔을 다른 질량으로나마 공유하고 있다면, 내 회상의 시도에 그림자처럼 등장하는 너를 설명할 수는 있다. 역시, 이를테면, 전화하지 않았다는 혐의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어지지 않은 전화선 너머로 점점 더 환상이 되어가는 너를 또렷하게 그리려다 보니, 자꾸만 묻게 된다. 나를 돌아보는 와중에 질문은 자꾸만 너를 향하고 마는 것이다. 기억하는가?


***










예쁜 일들


 사실 예쁜 일이 많았다. 감사한 사람도 많았다. 특히 그저 그렇고 그런 글이 '100번째 지난주'를 맞이하는 동안의 모든 일이 예뻤다. 꿈만 같다. 당신 덕분이었다. 감사한다. 다음 주에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겠다.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허수경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꿈 같은가 현세의 거친 들에서 그리 예쁜 일이라니  
       
 나 돌이켜 가고 싶진 않았다네 진저리치며 악을 쓰며 가라 아주 가버리라 바둥거리며 그러나 다정의 화냥을 다해    
 온전히 미쳐 날뛰었던 날들에 대한 그리움 등꽃 재재거리던 그 밤 폭풍우의 밤을 향해         

 나 시간과 몸을 다해 기어가네 왜 지나간 일은 지나갈 일을 고행케 하는가 왜 암암적벽 시커먼 바위 그늘 예쁜 건 당신인가 당신뿐인가         

 인왕제색커든 아주 가버려 꿈 같지도 않게 가버릴 수 있을까, 왜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내 몸이 마음처럼 아픈가    
    






참고

¹

-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작과 비평사, 2008


² 

- 이용한, 『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사, 2006


³

- 최승자, 『기억의 집』, 문학과 지성사, 1989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 지성사, 1992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pixabay, StockSnap 

https://pixabay.com/photo-2560651/     


*

- Laura Schatzkin, 『To Wear Your Words Like a Second Skin』, 2014 16″ x 20″ ink/watercolor/pencil

http://www.schatzkin.com/human-nature/


**

- bicyclethieves 홈페이지 

http://www.bicyclethieves.co.uk/gallery.html


***

- Laura Schatzkin, 『The Artist』, 2014, 16″ x 20″ ink

http://www.schatzkin.com/mythology-series-free-drawing-artist/the-ar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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