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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ul 30. 2017

밥의 시

일흔세 번째 지난주




먹고 사는 문제


 사회는 읽힌다. 그리해야 한다. 물론 읽기를 위해 쓰는 일이 앞서야겠다. 마치 풍경이 죄다 활자인 양, 우리는 우리의 오늘을 쓰고, 읽고, 고쳐 쓰고, 다시 읽기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생김이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바르게 나아가고 있는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라도 사회를 쓰고 읽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만만하게 쌓아 올려진 사태가 아닌 까닭으로, 이를 두고 신속하고 간명한 해답지를 발견하는 일은 여간 어렵지 않다.


 사는 일 중에서도 단연 무거운 업보로 ‘먹고 사는 일’을 들 수 있겠다. 지겹고도 지겨움에도, 또 퍼다 놓은 한 그릇의 밥공기 같은 거 말이다. 지난주, 혼자 밥 먹는 일로 소란이 있었다. 최초의 화자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중 민감한 어휘로 귀가 쏠렸으나, 응당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차라리 따져 묻고 싶은 바는 그가 접근한 (혹은 심취한) 면과 결만이 마치 전부인 양 말하는 태도에 있었다. 어찌나 여지를 허락지 않는지, 이어지는 부연의 타래들은 자연스레 외면하게 되었다. 그런 기이한 강건함을 나는 오랜만에 보았다. 환기가 되지 않는 방을 나온 나는 먹고 사는 일의 복잡성에 관하여 생각하였다. 당장 내가 사랑하여 읽고 또 읽는 시 몇 편이 떠올랐다. 밥의 내음이 나는 시 말이다.









밥 먹는 법 


밥 먹는 법
                                         정호승

밥상 앞에 
무릎을 꿇지 말 것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을 것 

무엇보다도 
전시된 밥은 먹지 말 것 
먹더라도 혼자 먹을 것 
아니면 차라리 굶을 것 
굶어서 가벼워질 것 

때때로 
바람부는 날이면 
풀잎을 햇살에 비벼 먹을 것 
그래도 배가 고프면 
입을 없앨 것

 ¹


 시끄러웠다던 지난주의 소란이 밥 먹는 방법에 관함이라고 해놓고서는, 또「밥 먹는 법」을 가져왔다. 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이 밥이 꼭 그 밥이 아니어서다. 나는 잘 먹는다. 잘 먹는 일이 흉볼 일은 아닐진대, 시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밥상 앞에 무릎 꿇지 말란다. 눈물로 만든 밥보다 모래로 만든 밥을 먼저 먹으란다. 그러고 보니 밥을 먹을라치면 밥과 재화를 교환하는 일이 우선일지라, 아마도 추측건대 이 「밥 먹는 법」에서의 밥은 내가 들고 간 그 몇 푼의 성격을 포함하는가 보다. 그러니 전시된 밥, 배고픈 이를 굴복시키고 예쁘장하게 차려 나오는 밥일지언정 아예 먹지 말란다. 혹여 먹더라도 그것이 무슨 자랑이 아닌 탓으로, 혼자 먹으란다. 아니면 굶든가…. 굶어서 가벼워지면 으레 허기가 밀려올진대, 그러면 바람 부는 날의 풀잎을 햇살에다가 비벼서 먹으란다. 그랬는데도 배가 고프면……. 


 시인은 오늘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에서 먹는 일의 재인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떳떳하게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결국, 이는 밥 먹는 법이 아닌, “생활의 법” 혹은 “살아가는 법”에 관함이다. 그렇다. 내가 이 밥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지를 항시 자신에게 따져 물을 일이다. 내가 어떤 일을 거들어 재화를 충당하는지 항시 돌아볼 일이다. 그리하여 당당하게 밥 먹을 일이다.






식사법


식사법
                                         김경미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 가지 반찬만 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닌지
제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깨물리곤 해도
그깟것 마저 다 낭비해버리고픈 멸치똥 같은 날들이어도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을 보다 많이 섭취할 것
생의 규칙적인 좌절에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빠져나와
한 벌의 수저처럼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할 것

한 모금 식후 물처럼 또 한 번의 삶, 을 
잘 넘길 것

²


 다시 먹는 법이다. 앞선 밥 먹는 법이 기실 살아가는 법이었다면, 이제는 진짜 먹는 법인가 보다. 대뜸 콩나물이며, 쌀알 등이 나온다. 그렇지! 콩나물은 푹 익혀야 한다. 쌀을 남기면 쓰겠나! 설탕이며 식빵의 가장자리도 다 먹어야 한다. 묵묵하게…. 설령 그것이 콩나물이나 쌀알이나 설탕이나 식빵이 아니라, 마음이며 고요며 인내며 심지어는 고통일지라도…. 다 먹어야 한다. 반찬은 성실 하나면 된다. 그래 성실하게 다 먹는 것이다.


 사는 일이 나를 부단히도 속이는 나날의 연속이면 야채처럼 유순한 눈빛들을 보다 많이 먹을 일이다. 좌절이 규칙처럼 찾아와도 생선처럼 미끈하게! 한 벌의 수저처럼 가지런하게! 그렇게 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한 채 말이다. 밥 먹고 물 넘겨 식사를 종료하듯이 삶의 한 끼, 한 끼를 잘 넘길 일이다. 먹는 일이 곧 사는 일이라, 사는 일이 또 곧 먹는 일이라, 설령 그 삶이 멸치 똥 같더라도 우리는 먹어야 한다. 다 먹어야 한다.


 부디, 잘 넘길 것!






서늘한 점심상 


서늘한 점심상 
                                         허수경   


잠깐, 광화문 어디쯤에서 만나 밥을 먹는다 
게장백반이나 소꼬리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이라도 
무얼 먹어도 아픈 저 점심상 

넌 왜 날 버렸니? 내가 언제 널? 
살아가는 게, 살아내는 게 상처였지, 별달리 상처될 게 
있다면 지금이라도 떠나가볼까, 
캐나다? 계곡? 나무집? 안데스의 단풍숲? 
모든 관계는 비통하다, 지그시 목을 누르며 
밥을 삼킨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너한테는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아, 가까이할 수 없는 인간들끼리 
가까이하는 일도 큰 죄야, 심지어 죄라구? 

너는 다시 어딘가에서 넥타이를 반쯤 풀며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머리를 누르고 
나는 어디, 부모 친척 없는 곳으로 가볼까? 
그때, 넌 왜 내게 왔지? 

너, 왜라고 물었니?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나, 어디 도시의 그늘진 골목에 가서 
비통하게 머리를 벽에 찧으며...... 

다시 간다

³


 게장백반이나 소꼬리 국밥이나 하다못해 자장면. 저 맛있는 메뉴들의 점심상이 어찌하여 아픈가? 광화문이면 제법 솜씨 있는 주방장이 정성껏 조리하여 내어놓을진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주 앉은 이로부터 내 상처가 보인다. 왜 날 버렸냐니까 기억도 못 한다. 그래, 살아가는 일이 상처이지, 네가 무슨 잘못이냐며 지금이라도 떠나볼 생각을 한다. 그리고 겨우 비통한 밥을 삼키고는 다시금 묻는다. “이제 나에게는 안 오지?” 그랬더니, 어떤 관계는 죄란다. 그래, 모든 관계는 비통하겠지…. 식사가 서늘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서늘한 점심상을 거두고, 네가 머리를 누르고 담배나 피우는 통에, 나는 어디 호젓한 곳으로 떠날 궁리를 하는데, “그때, 넌 왜 내게 왔지?”란다. 결국, 욕이 터져 나온다. 그래 인생은 이런 것이다…. (C'est la vie) 이 나쁜 것들아! ‘혹시’를 붙들고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진 내가 너무 아파, 그늘진 골목에서 머리를 찧는다. 비통하게…. 어느 만치 강하게 찧어야 이 비통하게 체한 서늘한 밥이 내려갈까?


 다시 간다. 






거룩한 식사


거룩한 식사
                                         황지우

나이든 남자가 혼자 밥을 먹을 때 
울컥, 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다 
큰 덩치로 분식집 메뉴표를 가리고서 
등 돌리고 라면발을 건져올리고 있는 그에게, 
양푼의 식은 밥을 놓고 동생과 눈흘기며 숟갈 싸움하던 
그 어린 것이 올라와, 갑자기 목메게 한 것이다 

몸에 한세상 떠넣어주는 
먹는 일의 거룩함이여 
이 세상 모든 찬밥에 붙은 더운 목숨이여 
이 세상에서 혼자 밥 먹는 자들 
파고다 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숟가락 가득 떠넣으시는 노인의, 쩍 벌린 입이 
나는 어찌 이리 눈물겨운가


 밥은 추억이기도 해서, 그저 내 앞의 라면을 삼킬 적에도 예전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기도 한다. 어릴 적 한 숟갈이라도 더 먹겠다며 다투던 어린 동생이 그 나이 그대로 떠오른다. 목이 멘다. 그렇겠다. 먹는 일은 몸에 한세상 떠넣어 주는 거룩한 일이며, 그 어떤 찬밥에도 더운 목숨 붙어있겠다. 그리고 시인은 혼자 밥 먹는 자들…. 특히 파고다공원 뒤편 순댓집에서 국밥을 먹는 노인을 보며 안타까워 눈물 훔친다.


 안타깝기는 하다. 다 써버린 몸이 시간이 남아 여전히 연료가 있어야 하는 시간에 겨우겨우 집어넣는 밥이라는 것은 곧 슬픔이 맞다. 그리하여 이 시는 슬프지 말자로 읽어야 한다! 설령 나의 쓸모가 다하더라도, 내가 밥을 해 먹을 수 있고 해줄 수도 있어야 한다. 당당하던 때에 목소리 높이며 얻어먹을 줄이나 알던 수컷들이 일제히 뒤로 밀려난 풍경은 아프기도 하지만, 자업에 따른 자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요리하자! 그것도 아주 맛있게 하자! 예쁘게 차려 낼 줄도 알자! 그래야 같이 먹겠다는 사람일랑 붙어있거나, 혼자인들 처연은 커녕 기쁠 일이다. 차후에 파고다 공원 뒤에서 울고만 있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밥심으로 산다는 것


 밥만치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나. 죽은 이를 떠나보낼 기력을 위해, 육개장에 밥을 말아 목구멍에 집어넣던 시간을 생각한다. 그래 밥심. 그 밥심으로 또 살아가는 것이다. 혹여 또 너무 슬픈 일을 만나 밥이 잘 안 넘어가면,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을 일이다. 이것저것 주워 먹는 것이다. 슬퍼하는 일에도 에너지는 드니까…. 그렇게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슬픔이 조금이나마 저물면, 꼭 맛있는 밥을 드시길 바란다. 


밥 
                                         천양희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서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참고

¹ 

 - 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창작과비평사, 1997


²

 - 김경미, 『쉿, 나의 세컨드는』, 문학동네, 2006


³

 -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 지성사, 1992


 -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 지성사, 1998  


 - 천양희,『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1998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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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ttp://mscsrk.or.kr/bbs/view.php?id=freeboard&page=4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asc&no=1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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