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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Dec 10. 2017

눈의 시

아흔두 번째 지난주




덮어주세요.


 나만 그런가? 나만 새 불안을 쉼 없이 제조하는가? 나만 마음의 부채를 켜켜이 쌓아두는가? 나만 욕망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는가? 근육의 떨림과 마음의 떨림은 관계가 있는지 평안을 거부하는 습성은 기온이 떨어지면 유독 더 난리인데, 이것도 나만 그런가? 가끔씩 나만 그렇지 않음을 확인할 때, 그러니까 어떤 인간이 같이 떨고 있을 때, 인간이 공들여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의심이 확신처럼 번져나갈 때, 원망 어린 눈초리로 하늘을 바라볼 때, 그때 눈이 내렸으면 하였다. 덮어주세요 하는 것이었다.


 마침 눈이 내린다. 하지만 마음의 분란을 가리기에는 아쉬웁다. 그리하여 덮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주술처럼 눈의 시를 읽어도 본다.


 또 나만 그런가? 









첫눈이 내린다.


첫눈
                                         정양          

한번 빚진 도깨비는
갚아도 갚아도 갚은 것을
금방 잊어버리고
한평생 그걸 갚는다고 한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도 그 비슷 했던가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도
소용없는 사람아
내려도 내려도 다 녹아버리는
저 첫눈 보아라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처럼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눈이 쌓인다


 도깨비는 바보다. 먹어도 먹어도 허천나던 흉년의 허기처럼 갚고 또 갚는다. 그래서 몇 평생 갚아도 모자랄 폭폭한 빚더미는 쌓이지 않았으나, 쌓인다. 그럼 또 갚는다.


 시인도 바보다. 내려도 내려도 녹아버리는 첫눈처럼 아무 소용도 없는데 자꾸만 보고 싶어 한다. 시인의 사랑은 첫눈을 닮아서 금방 사라지지만, 첫눈을 닮아서 내리고 또 내린다. 먼 산마루에만 희끗거리며 쌓여도 괜찮다. 또 내리면 된다. 보고 싶어 했음을 까먹은 양 또 보고 싶어 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한번 사랑한 시인은 한번 빚진 도깨비가 된다. 첫눈이 내린다.


*





기억의 진눈깨비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하루 종일 버스를 타본 일이 있는가? 창밖으로 걸쳐둔 시선은 온갖 생김을 배경 삼아 가져오고, 굳이 잊어야 할 것들만 기억하며 하루 종일 버스를 타본 일이 있는가? 아마도 시인은 그 어린 시절 흩날리던 진눈깨비를 지금 다시 맞고 있는 모양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귀갓길이었다. 퇴근하면서도 남은 일을 업어 오던 귀갓길이었다. 그 길에 내린다. 진눈깨비.


 익명의 타인들을 지나는 동안 서류봉투가 떨어지고, 허리를 굽히려는데 이 진눈깨비 언제 또 맞았더랬다. 기억은 진눈깨비에 실려 대학으로 간다. 대학을 졸업하며 했다는 참 많은 각오를 떠올리며, 놀란다. 다짐과 삶의 간극에 놀란다. 괜히 소설을 떠올리지만, 어느새 추억들이 구두 밑창에 밟힌다. 진눈깨비 사이로 펼쳐진 배경들이 어딘가 닮았다. 그 옛날 어린 시절 하루 종일 버스를 타고 보던 그 배경과 닮았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이런 삶을 살려던 것은 아니었다. 


**





찰나의 눈


갑자기 시작된 눈
                                         이현승

맹렬하게 가속도를 더하던 빗줄기들은
빙점을 통과하면서 가벼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생각난 문장처럼 눈발은 성기고
검은 저녁의 재가 석양을 뒤덮자
순식간에 북적이는 거리가 만들어졌다.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들이 갑작스러운 눈발에
하나같이 낭패감으로 허둥대는 길에서
나는 큰아이가 다니는 병원의 소아과 선생을 지나쳤다.
호주머니에 돌멩이를 잔뜩 넣은 버지니아 울프처럼
그녀는 잔뜩 앞으로 쏠린 채 걸어가고 있었다.     

얼마 전 나는 그녀에게 다급하게 매달리고 있었고
그녀는 발을 구르는 나를 차갑게 다독여주었다.     

다급하고 성마른 사람들이 하루 종일 붙들었을 그녀를
무심한 저녁 바람이 한번 더 흔들고 갔다. 그때마다
검게 죽어가던 불씨가 바람에 잠시 빨간 눈빛을 일으키듯
머리카락 사이로 지폐처럼 피로한 낯빛이 얼비쳤다.     

우리는 좁은 인도를 황급히 지나쳤다.
한줄기 불빛이 시력을 빼앗아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시력을 회복하는 동안 나는
망자의 뜬 눈처럼 열린 채 닫힌 눈으로
잿빛으로 지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기 두 가지 찰나가 있다. 하나는 눈이 오는 찰나다. 빗줄기들이 빙점을 통과하는 찰나에 눈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눈발은 지상의 속도를 높인다. 낭패감으로 허둥댄다. 그리고 여기 또 하나의 찰나가 있다.


 다른 하나는 생활의 찰나다. 언젠가 외친 바 있다. 단연코 가장 무거운 단어는 생활임을…. 사랑이 무겁게 들리지만, 한번 시작되면 그저 흘러간다. 끝나면 그만이다. 평화를 무겁게 내뱉지만, 누가 그것을 무겁게 듣나? 사랑과 무관하게, 평화와는 격을 달리하는 저울추의 이름은 생활이다. 그 무거운 생활의 돌멩이를 잔뜩 넣은 의사 선생을 지나친다. 바로 두 번째 찰나이다. 타인의 생활과 스치는 찰나의 순간이다.


 눈 덕분이다. 눈이 높여놓은 속도가 아니었다면, 좁아지지 않은 시야는 서로를 확인시켰을 것이고. 나눌 수도 없는 생활의 돌멩이는 내색하지 않은 채, 사회화된 인사말을 주고받아야 했을 것이다. 이미 그녀는 충분히 피로하다. 보탤 필요 없다. 우리는 마땅히 사회 이전에 하나의 개인 일지다. 하지만 어디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개인은 ‘아는 사람’이라는 존재 앞에 하릴없이 무력하다. 더군다나 그 ‘아는 사람’이 다급하고 성마른 채로 도무지 자신을 놓지 않는 사람들이었다면…. 그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마주쳤다고 이제 와 밝게 웃노라면…. 됐다. 눈이 마침 딱 맞게 내렸다. 나는 눈을 좋아한다.


***









인생의 오후에 내리는 눈


  눈(雪)과 눈(眼)의 음이 같음에 기대어 펼쳐내는 말들은 대체로 지루하다. 하지만 눈(雪)이 세상의 한끝이라는 전제가 있다면, 그것이 녹아 흐르는 물은 눈(眼)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아무도 울지 않는 세계사는 없으니까…. 그나마 포근하기를…. 이 눈에 미끄러지지 말고 마음만은 포근하기를…. 당신 인생의 오후에 포근한 눈발이 흩날리기를….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박정대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사랑은 멀리서 젖고
나무들은 선 채로 외투를 털고 있다
누군가 휘파람을 불었다고 생각하는 건
그대의 휘파람 소리가
환청처럼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구름의 휘파람 소리,
러시아 혁명사처럼 흐르던 한 떼의 구름이
허공에 인생 사용법을 쓰고 있다
계명을 몰라도
나는 휘파람을 불며
멀리에서 젖고 있는 그대에게
허밍의 세계사를 전해본다
그대의 머리카락이 떠받치고 있던 허공에서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견고함은 눈에 보이는 것들의 두툼한 외투
외투 끝으로
손을 내밀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눈송이를 받으면
세상의 한 끝이 내 손 위로 내려와
차고도 부드럽게 녹는다
나는 손금을 따라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바라본다, 누운

사랑은 멀리에서 이렇게 나에게로 당도해
하염없이 흐르는 것이다, 울란바토르
인생의 오후에 눈이 내린다

₄     





참고

¹

- 정양,『살아 있는 것들의 무게』, 창작과 비평사, 1997


²

-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입』, 문학과 지성사, 1989


³

- 이현승, 『생활이라는 생각』, 창작과 비평사, 2015


- 박정대,『삶이라는 직업』, 문학과 지성사, 2011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한국일보, 왕태석 기자, 2017년 12월 10일 자, “눈 내리는 서울거리 풍경” 

http://www.hankookilbo.com/v/72f5e1f28bf1401db85d308bbbc559ee     


*

- 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2017년 12월 6일 자, "빨리 치워야지"

http://www.yonhapnews.co.kr/photos/1990000000.html?cid=PYH20171206033900062&from=search


**

- REPORT, 2017년 1월 19일 자, “Ecologists predict cold weather, rain and sleet on January 20”

- https://report.az/en/ecology/ecologists-predict-cold-weather-rain-and-sleet-on-january-20/     


***

- Eispuppe.Memoriz, PHOTO, Gallery, Tori D. Lee, 2006년 2월 9일 자, “눈오는 거리”

http://www.eispuppe.com/zbxe/gallery/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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