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Jan 14. 2018

이웃을 위한 시

아흔일곱 번째 지난주




다들 따뜻한 곳에 있습니까?


 ‘겨울이 추워야지’라며 다 늙은 생각만을 빼꼼히 내어놓았는데, 이마저도 시리다. 분명 해마다 이맘때면 춥다는 투덜거림으로 한 계절을 보냈을진대 그 기억은 간데없고, 유독 오늘의 칼바람이 가장 날카롭게 새겨진다. 지난 여름날 가끔 동경하고는 했던 그 바람이 맞음에도, 나는 그런 적 없다는 모르쇠만이 당당하게 언 거리를 스치며 간다. 도착한 곳은 따뜻하다. 사무실에는 볼이 발그레해질 양 따뜻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고, 집에 올라치면 바닥과 수도꼭지와 이불 속이 모두 따뜻하다. 녹는다. 불평도 녹는다. 그제야 스쳐온 거리를 되짚는다.  

   

 가방 안에는 받고서 보지도 않고 구겨 넣은 전단지 한 장이 있다. 집 앞, 장사가 안되어 문을 닫은 식당의 자리에 다른 식당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이다. 이웃들의 소식을 차가운 거리에 선, 먼 이웃 아주머니가 나눠주는 전단지로 전해 듣는다. 그 순간을 다른 이웃들이 스쳐 지난다. 전단지를 나눠주는 아주머니 뒤로 차들의 흐름을 살피는 교통경찰과 폐지를 줍는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유로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따뜻한 처지에 와서야 생각이 났다. 그제야 궁금해졌다. 다들 따뜻한 곳에 있습니까?     


 답을 듣고자 다시 저 언 땅 위로 발을 내밀 용기조차 없는 나는, 겨우 시집을 펼친다. 이웃을 위한 시가 있어 몇 편을 옮겨둔다.










골목을 비추는 불빛


갈현동 470-1번지 세인주택 앞     
                                         이승희

 아리랑 슈퍼 알전구가 켜질 무렵 저녁이 흰 몸을 끌고 와 평상에 앉는다. 그 옆으로 운동화를 구겨 신고 사과 궤짝 의자에 앉아 오락 하는 아이의 얼굴이 불빛으로 파랗다. 저녁은 가만히 아이 얼굴을 바라보다, 작은 어깨 위로 슬며시 퍼져간다. 가로등이 켜지자 화들짝 놀란 저녁이 또 가만히 웃는 동안에도 아이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가 빨갛게 익었다가 다시 하얗게 질렸다. 갑자기 세상은 저녁 아닌 것이 없는 저녁이 되었고, 골목 끝은 해 지고 난 후의 들녘처럼 따뜻하다. 골목길을 따라 불이 켜진다. 낮에 보았던 살구나무에 달린 살구들처럼 노랗게 불 켜진 골목을 따라 집들도 불을 켜는 동안 나는 집 앞에 앉아 수학학원 간 딸애를 기다린다. 불빛은 얼마나 따뜻한가. 그림자를 보면 알 수 있지. 감추고 싶은 것 다 감추고, 아니, 더는 감출 수 없는 몸을 보여준다는 것은. 나는 때로 그렇게 따뜻한 불빛에 잠겨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우리 집에도 불이 켜졌다. 딸아이가 불빛을 따라 헤엄쳐 올 것이다.

¹


 어스름마저 지나간 저녁, 아직은 잠들 수 없는 사람들이 하루의 후반부를 분주히 장식할 시간이다. 그다지 북적일 일 없는 서울의 어느 골목에는 저녁 무렵 이웃의 일들이 불빛으로 대체된다. 골목의 불빛은 다양하다. 어떤 것은 하얗고, 또 어떤 것은 파랗다. 빨간 것도 있다. 가로등이 켜질 무렵 오락하는 아이의 얼굴 위로 모든 빛이 스친다. 골목은 집마다 켜둔 빛들로 가득히 차오른다. 덕분에 골목이 따뜻해졌다. 따스한 불빛을 받아든 시인은 가장 외곽의 형태만을 전시하는 그림자를 발견한다. 곧 불빛의 따사로움을 느낀다. 그 무렵 시인의 집에서 새어 나온 불빛을 쫓아, 시인의 딸이 헤엄쳐 귀가할 때가 되었다. 그림자가 조금 커지겠다.


*






네 이웃을 사랑할 이


우리 동네 목사님
                                         기형도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²


 시인의 동네에 사는 목사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양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는 이웃을 가만히 관찰하거나, 성경책 대신 송판을 싣고 다니거나, 교회 주변을 가꾸며 텃밭을 일구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기를 바랐다. 기어이 목사님이 이 말을 뱉었고, 사람들은 어떤 구실을 찾아 나섰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합니다.


 좋은 이웃은 없다. 어차피 이웃 같은 건 단어로만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좋은 중심자는 있을 수 있다. 좋은 어른으로 불러도 좋고, 대놓고 좋은 목사님으로 불리어도 좋겠다. 그런 이가 목사라면 네 이웃을 사랑할 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련다. 네 이웃을 사랑할 이를 곁에 두는 일은 사라져 버린 단어들의 몫이다. 시인의 동네는 동네가 사랑할만한 목사님을 찾았을지 모르겠으나, 교회 주변을 밝히던 꽃들은 다시없겠다.


**






남몰래 우는 사람


구천동
                                         박태일 

 사람들은 혼자 아름다운 여울, 흐르다가 흐르다가 힘이 다하면 바위귀에 하얗게 어깨를 털어버린다. 새도 날지 않고 너도 찾지 않는 여울가에서 며칠째 잠이나 잤다. 두려울 땐 잠 근처까지 밀려갔다 밀려오곤 했다. 그림자를 턱까지 끌어당기며 오리목마저 숲으로 돌아누운 저녁, 바람의 눈썹에 매달리어 숨었다. 울었다. 구천동 모르게 숨어 울었다.

³


 여기 숨어서 남몰래 우는 사람이 있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보았다.






아무도 울지 않는 이웃은 없다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이면우       

 깊은 밤 남자 우는 소리를 들었다 현관, 복도, 계단에 서서 에이 울음소리 아니잖아 그렇게 가다 서다 놀이터까지 갔다 거기, 한 사내 모래바닥에 머리 처박고 엄니, 엄니, 가로등 없는 데서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운다 한참 묵묵히 섰다 돌아와 뒤척대다 잠들었다.      

 아침 상머리 아이도 엄마도 웬 울음소리냐는 거다 말 꺼낸 나마저 문득 그게 그럼 꿈이었나 했다 그러나 손 내밀까 말까 망설이며 끝내 깍지 못 푼 팔뚝에 오소소 돋던 소름 안 지워져 아침길에 슬쩍 보니 바로 거기, 한 사내 머리로 땅을 뚫고 나가려던 흔적, 동그마니 패었다. 


 누구나, 그 어떤 사연으로 인해서건 슬프다. 적어도 누구에게나 그럴 때가, 그런 밤이 있다. 어느 날 시인은 제 속에 성냥불 켜대듯 깜박깜박 우는 한 사내를 보았다. 돌아와서는 마음이 한참이나 복잡해져서 잠 못 이룬다. 날이 밝자, 가족들도 물어온다. 얼버무리고 넘어간다. 놀이터에 두고 온, 내밀지 못한 손을 찾으러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슬픔의 모양을 보았다. 아무도 울지 않는 이웃은 없다.


***










이리도 추운데 이웃은 따뜻하게 지내고 있을까?


가을 깊은데 
이웃은 무얼 하는 
사람일까      

秋深き隣は何をする人ぞ 

 ⁵


 마쓰오 바쇼(松尾芭焦)의 하이쿠이다. 계절적 배경은 맞지 않으나, 비슷한 물음이 들어 가져왔다. 이리도 추운데 이웃은 따뜻하게 지내고 있겠느냐는 궁금함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비겁하니 감정의 공유만을 실어나를 뿐이다. 여전히 나는 따뜻한 곳에서 글을 쓴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알고 있다. 흔히 ‘시스템’이라 부르는 것 말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리하면 어느샌가 우리의 마음들도, 추운 데서 잘 수밖에 없는 이를 실패자로 내몰지 않으리라 믿는다. 이토록 나만 사랑하는 나도 마음의 여유를 조금은 더 내어 보련다.


 춥다. 모두 따뜻한 곳에 계시기를 바란다.







참고

¹

- 이승희,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문학동네, 2012


²

- 기형도, 『입 속에의 검은 잎』, 문학과 지성사, 1989


³

- 박태일, 『그리운 주막』, 문학과 지성사, 1984


-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장과 비평사, 2001


- 마쓰오 바쇼, 류시화 옮김, 『바쇼 하이쿠 선집 : 보이는 것 모두 꽃 생각하는 것 모두 달 마쓰오 바쇼』, 열림원, 2015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이면우,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 창장과 비평사, 2001, 직접 촬영     


*

- 한량, 이글루스 블로그, 「이천구년의 골목길 그리고 이천십이년의 약속」 

http://egloos.zum.com/hanryaang/v/2261357


**

- sbs 뉴스, 김범주 기자, 2012년 6월 15일 자, “[취재파일] 불 끄는 교회 십자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1229204


*** 

http://www.flickriver.com/photos/tags/%EA%B7%B8%EB%84%A4/interesting/

이전 06화 눈의 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