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덟 번째 지난주
잘 모르는 일에 말을 보탤 때, 상처를 생각한다. 사실에 어긋날까 두려워서는 아니다. 그 정도는 말이 번져나가면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좀 부끄러워질 뿐…. 이미 충분히 부끄러운 사람이 조금 더 부끄러워진다 하여 별 탈은 없겠다. 정작 망설여지는 연유는 상처가 될까 봐서이다. 각자의 마당에 선 모두에게 같은 정도로 영향을 가하는 그런 말은 없으니까…. 그리하여 모든 말은 아주 조금이나마 어떤 이에게든 상처가 된다. 웅얼거렸다. 그렇게 이도 저도 못 하다가 입속에서 음성이 되지 못한 파동을 삼킬 때, 그때, 순간, 갑자기, 채비도 못 갖춘 한 마디가 세상에 허락도 없이 닿는다. “잠깐만요!”
“잠깐만요!”라고 한다. 아직 나는 이 기이함을 나의 문장으로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말은 해야겠으니까. 법이라고 하는 것이 좀 이상하여도 법이라니까 그냥 엉거주춤하였는데, 살짝 귀를 기울이니 모든 일이 다 수상타. ‘함부로’들이 그렇다. 왜 시선 없는 타인을 ‘함부로’ 찍는가? 왜 그 웃음을 ‘함부로’ 판단했는가? 왜 ‘함부로’……. 누군가는 입에 담기도 힘든 말을 어떤 누군가는 몸으로 하였다 한다. 외면했다. 마음의 평안은 소중한 가치이다. 그런데 입에서는 “잠깐만요”가 나가버렸고, 잘 모르는 일에 세 치 혀를 휘두르는 두려움이 곧장 뒤를 따를 때, “잠깐만요”가 나갈 때 마냥 순간, 갑자기, ‘나의 도피처는 시(詩)뿐인가?’ 한다. 이런 시들이 있다고 안내한다. 시에게 미안하다가도 이내, 그럴싸한 변명이 떠오른다. 이래야 ‘함부로들’에게까지 닿을까 싶어서…….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
허수경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이가 된다
폭풍이 오고 지붕이 날아가고 지붕 아래에 있던 얼굴이 날아가고
젖가슴이 작은 여자아이들은 머리에 꽃을 꽂고 거리를 서성인다 상어떼처럼 차들은 여자아이의 치마를 할퀴며 지나가고 검은 코끼리 같은 구름이 찢어진 치마 안에 손을 넣는다
덜 자란 아이들은 언제나 덜 자라 이 거리에서 돈을 벌지 못하고 아이들의 가슴에 든 지폐는 영혼을 팔아 바다를 사고 적막한 눈을 감고 바다는 오 오 거리에서 팔던 오뎅국물처럼 졸아든다
그리고 집을 묻는다 지나가는 사람은 술 취한 눈을 들어 여자아이를 바라본다 낡은 들보 같은 여자아이의 젖가슴에 손을 집어넣으며 지나가는 사람은 아이를 안는다
바람이 불고 바람 사이로 먹소금이 일어나 작은 자궁으로 들어가고 먼 훗날 그 자궁에서 늙고 조그마한 아가가 자라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가들은 자라나
¹
읽어서 아픈 시는 특징이 있는데, 이해하기는 쉬우나 다시 읽기는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해가 어려울 시는 아닌 듯하여, 하나하나 꼬집어 되뇌지는 않으련다. 다만 숙제는 이행하기로 한다. 이 시는 독자에게 두 가지 숙제를 부여하는데, 하나는 시작부분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이가 된다”에서 그 이전의 시간이 어찌 흘렀는지에 대한 여백과 마치 미완성으로 끝나 버린 듯한 마지막 행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가들은 자라나” 이후의 여백을 채우는 일이 그것이다.
첫 숙제에는 정답이 있다. 위 시가 실린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서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의 바로 앞 장에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이라는 시가 실려 있음이다. 곧 「여자아이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집을 묻는다」는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을 이어받는 연작시의 성격을 지닌다. 그러나 시를 읽는 행위가 반드시 시집이라는 책의 형태에만 머무를 수 없는 탓으로, 주어진 시만을 따로 떼어내어 읽어보기로 한다. 시 속의 아이들은 풍요로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폭풍이 오면 지붕이 날아가는 곳에서 살아가는 여자아이들은 차마 머리에 그리기에도 끔찍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온전하게 태어났다.
위 그래프를 내세우며 너무 큰 질문을 마주해야 함을 알았다. “삶은 온전히 축복인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잠시 미루어 두고, 햇빛조차 볼 수 없었던 삶들을 생각한다. 이는 요즘 전개되는 ‘낙태’ 논쟁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다. 여성임을 감별당한 그 자체로 사그라진 생명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80년대 들어 초음파 검사로 출생 전 성별을 미리 알 수 있게 되자, 여아(女兒)라는 이유만으로 낙태가 횡행하였다. 저 말도 안 되는 수치는 이것이 오로지 몇몇의 경우가 아닌, 사회적 병증으로 해석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증명한다. 이는 혐의의 짙음과 옅음을 떠나, 모두가 공범임을 동시에 증명한다. 그런데 참으로 우스웁다. 그런 사회를 지나온 공범들이 이제는 남성의 짝이 없다며 개탄하고 있다. 우리는 유행의 변천으로 그 외형만이 조금 달라졌을 뿐인가 보다.
다시 시를 읽는다. 통계 수치 속의 지역과 시간이 반드시 시의 배경과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맥락만은 또렷하게 읽을 수 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아예 태어날 수도 없거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태어나더라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음을 말이다. 그리하여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이가 된다”의 생략된 앞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고자 한다. “운이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으나, 딸 중에도 세상의 빛을 본 아가가 있었다. 이렇게 시간은 지나가고 아가들은 자라나 아이가 된다”
두 번째 숙제인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은 자라나’ 이후의 여백은 이어지는 두 편의 시로 메우려 한다.
여자는 최후의 피압박계급?
고정희
(…)
어즈버
문명국이 된 오늘날까지
방직공장과 기성복 공장
그리고 또 무슨무슨 공장에서
우리의 이쁘고 이쁘고 이쁜 딸들이
저임금과 철야, 잔업에 시달리며
생산증대 길쌈과 바느질로
돈받이 달러받이 일삼는 것 아니리까
구중궁궐 기계실과 밀실에서
성폭력과 강간폭력 노동통제 남근에 깔려
어머니 당했어요, 현모양처 되기는
다 틀렸어요, 돈이나 벌겠어요!
기생관광 인당수에 몸 던지는 것 아니리까
²
역시나 시어를 짚어가며 읊지는 않으련다. 다만 몇몇 명사를 바꾸어 읽어본다. 방직공장이며 기성복 공장을 어떤 가구회사나 카드회사 등으로 돌려 읽는다. 심지어 어떤 병원으로 고쳐 읽는다. ‘문명국’에도 정도가 있다면 일반의 인식 속에 작금은 훨씬 더 문명국이 되었을진대, 기이하게도 오늘의 사태로 바꾸어 읽음에도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 반드시 '나아짐'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되새겨야 할 뿐인가 보다.
왜 여전할까? 여전한 것들을 본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의 남녀 간 임금 격차는 37.2%였다. 비교가 가능한 18개국 가운데 1위라 한다. 격차가 30% 넘게 벌어지는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단다. 돈을 적게 받는 것과 정신적 육체적 폭력의 상관관계를 명확하게 입증할 수는 없다. 다만, 임금을 적게 받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만만한 상대로 여겨질 수 있음은 주지의 사실로 내세울 만하다. 언젠가 『직장의 신』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내용과는 무관하게 등장인물만을 본다. 극 중 김혜수가 연기한 ‘미스김’과 정유미분의 ‘정주리’ 중 누가 폭력의 대상이 될까?
흔히 남성들은 더 섹시하거나 옷을 야하게 입는 여성을 지목하며 원인을 여성에게 전가하지만, 실지 누가 더 외형적으로 매력적인가의 문제와는 무관하다. 바로 뒷일이 생겨도 말하지 못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이면 백 ‘정주리’가 대상이 된다. 만만하기 때문이다. 만만한 상대를 반드시 폭압 하는 정신의 기저에는 철저히 계산된 비겁함이 있다. 그런데 이 비겁함은 여성 개인의 만만함이라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은 채, 고스란히 사회로 확장한다. 위 시가 쓰인 그때와 지금이 조금도 다르지 않음은 여전히 이 사회가 비겁하다는 사실에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성을 만만한 대상으로, 곧 ‘미스김’을 꿈꿀 수 없는 ‘정주리’로 묶어두어야 그들만의 꽃이 사무실 한쪽에서 자라날 수 있기에, 공장의 이름을 바꾸어 읽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비일비재하고도 오래된 이 비겁함이 개선될 여지라는 것 따위는 도무지…….
잃어버린 것들
김혜순
(…)
밥그릇 속에 흘렸다가
무심코 설거지해버린 내 영혼
잘라버린 머리칼과
내가 감고 태어났던 붉은 탯줄
모두들 어디로 갔을까?
난
아마
죽어서도
죽음을 잃어버려
구천을 헤맬 거야
³
전쟁터 같은 직장으로 향하지 않은 여아들의 삶은 어찌 될까? 그나마 나을 법은 하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도 여전하다. 설거지하다가 영혼이 씻겨 내려갔다. 그뿐만이 아니다. 머리칼이며 탯줄이며 나와 관계된 나의 것이라는 것은 죄다 어리론가 가버리고 없다. 집에만 있었는데도, 내 영혼과 그와 관계된 것은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마치 죽음마저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아마도 죽어서도 죽음마저 잃어버려 구천을 헤맬 것이라며, 담담하게 더없이 깊은 슬픔을 되뇐다.
지지난 주와 지난주 직장 내에서 불거진 문제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마치 이 같은 아픔이 집 밖에서만 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집이라는 울타리 속에만 있었는데도 무언가를 자꾸만 잃는다. 나를 잃고 어떤 가전제품처럼 기능하였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영혼과 관련된 것들은 쓸모없어졌고, 결국 다 잃었다. 요즘에는 많이 “돕는다”라고 한다. 가사(家事) 말이다. 서술어의 활용으로 보아, 여전히 멀기만 하다.
상한 영혼을 위하여
고정희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거리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어도 새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 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 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디를 못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서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으니
⁴
시 중에서도 유독 말을 건네는 시가 있다. 위 시를 읊자. 그 입은 말을 건네면서도 시선은 갈대를 향한다. 비록 상한 갈대일지언정 그 뿌리가 깊다면야 다시 새순이 돋더란다. 그리하여 상한 영혼일지라도 흔들리면서도 고통에 맞서잖다. 또한, 이 세상 어디에도 물은 들고 빛은 비치나니, 아예 고통에 살 맞대고 가잖다. 이 같은 역동적인 청유는 청자가 근육을 움찔하게 할 만치 적극적이다. 그리고 혼자 보내지도 않고 함께 해줄 양이다. 자꾸 “가자, 가자” 한다. 그리하면 결국 “뿌리 깊은 벌판”에 설 수 있단다. 그 확증은 영원한 눈물도 영원한 비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화자의 믿음에 근거한다. 이 보편적 믿음은 이토록 듬직한 화자와 함께 “마주 잡을 손”을 기다리고 싶을 만치 설득력이 있다. 그 순서를 바꾸어, 이토록 듬직한 화자이기에 영원한 슬픔은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싶어 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읽는 이에 따라 그저 듣기 좋은 응원 문구에만 머무를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시뿐만이 아닌 시인에게 기대어 본다. 故 고정희 시인은 아픔으로 파인 자리마다 시로 메우며 이 땅을 다녀간 시인이었다. 특히 여성의 아픔을 못 본 체하지 않았다. 예쁜 말로 꾸미지도 않았다. 어느 지점에서 뒤틀렸는지, 어떻게 썩어가고 있는지, 어찌해야 나아질 수 있는지, 지금 네가 왜 아픈지를 짚어주던 이 땅의 딸들을 위한 시인이었다. 그 시인이 영혼이 상한 딸들을 위해 한 편의 시로 위로를 건네고 있다. 고정희 시인이 다른 시들로 함께 분노했다면, 이 시를 통해 그저 다독이고 있을 뿐임이라…. 부디 상한 영혼들에 위안을 되기를 바라본다.
두 가지 가능한 지적을 잘 알고 있다. 하나는 책임에 관함이다. 여성의 아픔을 새긴 시들을 읽는 정도로는 그 어떤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분명 어떤 이는 이렇게 낭만적 취미로 넘길 일이 아니라 할만하다. 좋은 지적이다. 그러나 그냥 넘기려 함이 아니다. 시의 방식으로 꼬집고 넘어가는 일이다. 만일 이것이 하나의 투쟁이라면 힘껏 외친 날의 밤에 함께 나누어 읽으면 좋을 그런 시들을 모았음이다. 크게 보자면 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투쟁 중에, 피가 없는 투쟁을 위해 시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작게는 일상 속 소소한 투쟁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감정에 대비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공고한 것들은 여전히 공고하니까…. 그리하여 이 시들은 그리고 이 시들을 읽음은 나름의 책임을 이행하는 일이 된다.
다른 하나는 부끄러움에 관함이다. 위와 같은 시들을 읊는 일이 ‘나는 멀리에 있다’라는 피아식별의 징표로 사용되기를 바라지 않았으면서도, 그 기능을 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고작 좋은 시 몇 편을 빌려와서는…. 이 부끄러움은 좀 크다. 기억하며 살 일이다.
참고
¹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작과 비평사, 2001
²
- 고정희,『여성해방 출사표』, 동광출판사, 1990
³
-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2001
⁴
- 고정희,『이 시대의 아벨』, 문학과지성사, 1983
참고 논문
- 김향라, 『한국 현대 페미니즘시 연구 : 고정희 ‧ 최승자 ․ 김혜순의 시를 중심으로』, 경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이주언, 『1980년대 한국 여성시에 나타난 시적 전위성 연구 : 김혜순, 최승자, 김정란의 시를 중심으로』, 창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7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오마이 뉴스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 2008년 7월 31일 자, “행복한 책 읽기” 중 “고정희《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
- 매일신문, 이상준 기자, 2016년 5월 1일 자, “아들만 낳다보니… 사라진 5월의 신부”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21980&yy=2016
**
- 한겨레, 김경락 기자, 2016년 3월 8일 자, “OECD중 한국 여성 임금격차 꼴찌, 고용률 하위, 승진율 바닥”
- 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33913.html#csidx5a9de8336972325a0e1351494347e61
***
- TV Report, 이혜미 기자, 2013년 4월 23일 자, “‘직장의 신’ 정유미, 다이아몬드보다 예쁜 메주? 이희준에 반했다”
-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337719
****
- 내일신문, 김아영 기자, 2015년 12월 7일 자 “한국남자 집안일 45분 OECD 최하”
- http://m.naeil.com/m_news_view.php?id_art=176346
*****
- 오마이 뉴스, 최종규(함께살기) 시민기자, 2003년 8월 23일 자, “고정희 씨 시모음 <여성해방출사표>”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40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