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콩딘이 May 12. 2024

본체와 버추얼 사이, 그 혼란스러움에 대하여

내가 좋아하는 건 플레이브의 이미지일까, 그 안에 있는 사람일까

플레이브(Plave)에 빠지고 유튜브에서 영상을 하도 찾다보니, 눈치없는 알고리즘이 자꾸만 중간에 본체들의 영상을 하나씩 끼워 추천해준다. 플레이브를 검색하면 멤버들 영상 사이에 왠 낯선 아이돌의 5년 전 영상, 1년 전 영상이 뜨는 식이다. 본체의 존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유튜브에서 갑자기 왜 이런게 추천되냐며 넘겼었는데, 본격적으로 이들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서 깨달았다. 저 사람들이 본체일 수 있겠구나.


플레이브 본체를 알고 싶지 않아도 알려주려는 세상과 싸우고 있다


플레이브 본체들의 모습을 따로 찾아본 적은 없었다. 찾아보려면 언제든 찾아볼 수 있지만, 아니 굳이 보고 싶지 않아도 세상이 자꾸만 나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구글이든 유튜브든, 온라인에서 플레이브만 검색하면 실시간으로 상위에 뜨는 연관 검색어에는 꼭 본체 이야기가 들어간다. '플레이브 본체', '플레이브 본체 김00' 같은 식으로 궁금하지 않았던 본체의 존재를 폭로하는 연관 검색어들이 나를 유혹해온다. 주변 지인들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플레이브 팬이라고 말하면 자동으로 이어지는 질문이 "플레이브 본체도 누군지 알아?"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모두 한 번쯤은 본체를 검색해 봤다는 얘기다.


나는 "본체는 모르고 앞으로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플레이브를 좋아할 뿐. 본체가 누군지 어떻게 생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애써 주제를 돌렸다. 환상을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플레이브를 좋아하는 거니까 굳이 본체에 대해 알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충분히 행복한데, 그냥 이 상태에 계속 머물러도 괜찮은 거 아닐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사실 마음 한 켠에서는 본체의 외모에 실망할까봐, 그래서 내 마음이 빠르게 식어버릴까봐 걱정 됐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본체를 검색해보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나도 이제는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 아닐까 싶었다. 차마 직접 확인해 볼 용기까진 나서, 남편이 보고 나에게 어떤 지 말해달라고 했다. 구글에서 그들의 사진을 찾고 있는 남편을 반대편에서 지켜보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혹여라도 외모가 별로라는 말이 나올까봐 심히 걱정이 됐다.



내가 팬이 된 이유가 플레이브의 멋진 외모 때문은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한 건 내가 플레이브를 좋아하게 계기가 외모 때문은 아니라는 거다. 그들의 노래가 좋았고, 그러다 우연히 라이브 방송에서 그들의 입담과 케미스트리가 좋았고, 꿈을 향한 그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좋았다. 그러니까 외모는 내가 그들의 팬이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아니었다.


하지만 외모가 아예 상관없었냐 하면 그렇게 딱 잘라서 말하기는 또 어려울 것 같다. 왜냐면 멤버들의 순정만화스러운 외모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내가 쉽게 호감을 느끼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플레이브는 다섯 명의 멤버 모두 균형있고 오밀조밀한 매력적인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 웃을때나 찡그릴때나 어떤 표정을 지어도 다 이쁘게만 표현되는 얼굴이다. 여기에 길쭉한 팔다리와 넓은 어깨,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비율도 무의식 속에서 그들의 팬이 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잘생겨도 완벽한 형태의 버추얼보다 더 잘생기긴 사실상 어렵지 않을까. 그래서 남편의 대답이 어떻게 나올지 심히 걱정이 됐다. 


그냥 누가 봐도 딱 아이돌 같이 생겼는데? 남편의 대답이었다. 그의 기준으로 잘생겼단 뜻이었다. 순간 한 시름 놓았다고 해야할까. 잘생겼다고 해도 부러 찾아보진 않았을 테지만, 못생겼다고 하면 차마 찾아보진 못하고 자꾸 버추얼 뒤에 존재하는 본체에 대해 안 좋은 쪽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 것만 같았다. 그러다 점점 식어버렸을 수도. 마치 소개팅 전에 카톡으로 재밌게 얘기도 나눠놓고 막상 만났는데 상대가 내 스타일과 정반대라 갑자기 애정이 팍 식어버렸다는 소개팅 후기처럼.


갑자기 혼자서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언제부터 이렇게 피상적인 인간이 됐나 싶고. 사실 플레이브와 플레이브 본체는 말투, 행동, 목소리까지 모두 똑같은데 외모만 다르기 때문이다. 외모 하나 때문에 그 사람의 내면과 그 외 모든 것들을 부정하는 내 모습이 너무 가벼운 것 같았다. 그동안 애정을 가지고 쌓아온 시간들이 있는데... 갑자기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체 그동안 누구를 좋아한 걸까. 버추얼 아이돌 그 자체였을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이었을까. 아니, 아예 본체와 플레이브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봐도 되는 걸까.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들진 않았다


버추얼 아이돌을 실체가 있는 존재라고 볼 수 있을까. 애초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카엘룸', '아스테룸', 그리고 '외계인'이라는 설정과 함께 시작된 거 아닐까. 나는 그럼 실제하지 않는 존재를 좋아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플레이브 실체를 본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실존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나기 시작했고 혼란스러움은 더 커져갔다.


다른 팬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살펴봤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플레이브 본체는 알고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플레이브 그 자체를 소비하고 있다.' VS '플레이브 본체도 잘생기고 멋지더라. 플레이브도, 플레이브 본체도 같이 좋다'. 나처럼 본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쪽 보다는 오히려 본체의 존재를 인지하고, 팬으로서 플레이브의 본체와 버추얼을 새로운 아이돌 문화로 함께 받아들이는 입장이 우세한 것 같았다.


결국 나도 본체를 직접 한 번 찾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흐린 눈으로 외면하던 유튜브 알고리즘도 함께 시청했다. 놀란 것은 기획사에서 영리하게 처음부터 그렇게 기획했던 것인지 실제 멤버들의 모습과 버추얼 이미지는 꽤 흡사하긴 했다. 버추얼처럼 완벽하게 잘생겼다는 것보다는 본체의 이미지가 버추얼 멤버들이 풍기는 분위기와 꽤 많이 비슷했다. 그러니까 예준이는 예상했던 예준이스럽게 생겼고, 노아는 딱 노아스럽게 생긴 그런 이미지. 


막상 실체를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전보다 더 덤덤해졌다. 플레이브를 좋아하는 마음이 줄어들었냐고 하면 그렇지도 않았고 그냥 전과 똑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본체를 좋아하게 되진 않았다. '아, 저 사람이었구나' 정도로 느껴졌다. 그리고 다시 플레이브의 영상을 보고 그들의 노래를 들으니 본체의 모습은 흐릿해지고 버추얼 멤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처음 플레이브를 접했을 때 그렇게 접해서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본체 이미지가 버추얼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렇게 충격받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무튼 플레이브 본체는 생각만큼, 내가 우려했던 만큼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한 건 아무래도 플레이브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나에게 플레이브 멤버들은 본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외모는 같되 본체만 바뀌면 내가 좋아했던 그들의 매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본체들이 직접 내게 말을 걸며 '플리'라 불러주고 노래하고 춤을 췄던 건 아니니까. 본체는 오히려 타인에게서 느끼는 그런 감정에 더 가까웠다. 


그러니까 결국 팬으로서 좋아하는 것일뿐 달라진 건 없었다 


재밌기도 했다. 어쩌다 버추얼 아이돌을 좋아하게 돼서 이런 고민까지 하게 됐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어떤 연예인이든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었다. 어떤 배우나 아이돌을 좋아할 때 그들의 화려한 모습에 반하고 동경하게 되는데 그게 버추얼이 아닌 실제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그 사람의 실체를 잘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에는 드라마 속 역할을 좋아하는 거고, 무대 속 모습을 좋아하게 되는 걸텐데. 팬으로서 나는 그들이 보여주는 그 모습만 보고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렇게 놓고 보면 버추얼 아이돌인 플레이브도 마찬가지일거다. 멤버들이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를 믿고 응원하면 되는 거다. 여전히 그들의 음악과 방송은 나를 행복하게 하고, 그들의 팬인 것이 자랑스럽고, 팬으로 활동하는 것에서 큰 재미를 느끼고 있으니까. 그것만큼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이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이전 03화 메디힐 사태로 느낀 팬심의 무서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