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콩딘이 Jun 08. 2024

인공수정, 그리고 첫 번째 유산(1)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 보낸다는 것

여름을 향해 치닫고 있는 지금의 날씨와 대조적으로 당시는 손발이 모두 꽁꽁 얼어버릴 정도의 매서운 추위가 가득했던 겨울이었다. 그러니까 벌써 반년이나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그때의 일들은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이전까지는 매일매일 일기를 써왔다. 그러나 지금 일기장은 그때의 이후로 멈춰버렸다. 당시에 있었던 일들을 다시 꺼내고, 그때의 감정을 돌아보고, 상처받은 자신을 마주하는 일을 차마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외면해두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6개월이 지났다. 다시 새로운 시도로 인한 기대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니 누군가 앞에서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이렇게 정리를 잘 해야 진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한 번의 유산을 경험한 적이 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그러니까 난임을 진단받고 인공수정이라는 것을 처음 시도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할까. 그렇다면 작년 11월이다. 몇 차례의 자연임신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였다. 난임시술이라는 걸 처음으로 경험해보게 된 나는 일단 아주 간단하다고 할 수 있는 인공수정부터 시도해보기로 했다. 시도할 때의 마음은 솔직히 이게 되려나 싶은 게 컸다. 인공수정의 성공 확률이 10%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임신을 할 때와 비슷한 확률. 그래서 난임인 사람들에게 인공수정 1회만에 임신이 되는 건 거의 기적과도 같은 확률이라고들 했다. 오죽하면 난임 커뮤니티에서는 그런 사람들한테는 '로또 맞았다'는 표현을 쓸 정도였다.


나는 뽑기 운이 좋다거나, 소소한 행운이 잘 찾아오는 타입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운이 좋게 얻어 걸렸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인생에 몇 번 없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 찾아온 대부분은 행운은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노력으로 일궈낸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인공수정도 딱히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죽했으면 인공수정 시술 당일, 시술이 끝난 의사 선생님의 손을 붙잡고 "이거 끝나면 바로 다음에 시험관 시도할 수 있는거죠?"라고 물었을 정도다. 의사 선생님은 아직 시작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채 벌써부터 체념하고 있는 환자에게 "이번 시도가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일단 한 번 지켜봐야죠!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라며 웃었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너무 희망적인 것 같았다. 이번에는 아닐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이번 차수에 임신을 하게 된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난임 진단을 받기 전 6개월 동안 자연임신을 열심히 시도하면서 나는 내내 실패감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부터는 이게 장기전으로 갈 것 같다는 체념 같은 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는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서 실패하더라도 너무 크게 실망하지 않도록 주문을 외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기대가 너무 크면 그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실패했을 경우에도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빠르게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도록, 예측 불가능한 실망의 크기를 굳이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2주가 흐르고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인공수정 시술이 끝나고 2주 뒤에 피검사가 예정돼 있었다. 꼬박꼬박 질정을 넣고, 엽산을 먹고 착상에 도움이 될까싶어 그동안 걸러왔던 아침 식사도 했다. 단백질이 몸에 좋다고 해서 두유도 먹고 고기도 많이 먹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착상이 되면 일어난다는 증상들이 전혀 없었다. 혹시 몰라서 10일쯤 지난 날에 임테기도 해봤는데도 명확한 한줄이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쉽게 될리가 없지.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14일째 되는 날 피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향했다.


오전에 한참 근무하고 있는 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피검사 결과가 80대라는 것이다. 80이라는 게 뭔가요?"라고 내가 되물었다. 간호사 선생님은 80이면 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수치라고 했다. 나는 뛸 뜻이 기뻤다. 기쁨의 탄성을 내지르는데 반대로 상대방은 너무 덤덤했다. 그 흔한 '축하합니다'라는 말도 없었다. 평소에는 다정하고 세심한 간호사 선생님인데 기뻐하는 내 반응을 듣고도 말을 삼가시는 것 같았다. 당시에는 그런 반응이 조금 낯설다고만 생각하고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초기라 오히려 말을 아끼셨던 것 같다.


누구보다 이 결과를 궁금해하고 있을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에게 임신이라는 걸 알리자마자 너무나 기뻐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당장 부모님께 전화해서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했었지만 내가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했다.


인공수정이니 피검사니 하는 것들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던 나는 이제서야 제대로 80이라는 수치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찾아볼 여유가 생겼다. 보통 첫 피검사를 했을 때 10이 넘어가면 임신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틀 뒤, 또 이틀 뒤 피검사를 했을 때 그 숫자가 2배 이상씩 올라가는 안정적인 '더블링'이 됐을 때 임신이 잘 유지된다고 판단한다. 나의 경우 처음에 80대가 나왔으니까 이틀 뒤에 160대, 이틀 뒤에 320대가 나와야 안정적으로 임신이 유지되고 있는 거였다. 일단은 좀 더 지켜봐야 하는 단계였다.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뛸듯이 기뻤다. 퇴근 후 집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를 격하게 끌어앉았다. 남편도 나처럼 하루종일 구름에 있는 듯한 신나는 하루를 보내다 돌아왔으리라. 당연히 안될거라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좋은 소식이 찾아와준 것에 대해서 하늘에 감사했다. 모든 것이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고, 우리는 아기 태명은 뭐라고 지을 것인지, 성별은 어떻게 될 것 같은지, 태몽은 언제쯤 꾸게 될런지 늦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 행복감은 정확히 이틀 뒤부터 불안감으로 변했지만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