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군대, 유학 준비, 취업

by BeyonJ

1930년생 큰형은 6.25 전쟁 때문에 대학 전공 (의학)을 중단하고 군대 입대했다. 학생 때부터 영어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통역 장교를 시작하여, 군대 제대 전부터도 서울 고등학교, 경기 고등학교 영어선생으로 교편을 잡고 계셨고, 제대 후에는 연세대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정식 대학 졸업장이 없었으므로, 나중에 경희대에 3학년으로 편입해서 졸업장은 받긴 했지만, 외국 유학하여 정식 대학 졸업의 경력을 쌓고 대학에서 가르치려면 박사학위까지 필요했으니까 꼭 유학을 가야 될 입장이셨다. 그래서 어찌어찌해서 scholarship을 받았을 거고 그래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다.


1933년생 큰누나는 특별한 인생관을 갖고 있어 서울사대 영문과를 졸업했지만, 선생의 길을 가지 않고 영국대사관에 취직하기도 했고 그 후 또 이대에서 영문과 석사학위를 받았다. 배화여고 시절에는 승마도 했고 (당시 여학생으로 승마를 했다는 것은 상당한 진취적 사고였고 이것 때문에 아버지한테 혼도 났었다) 대학 재학 중과 그 후에도 무용 (주로 현대무용)도하고 서예와 동양화한다고 당시 유명한 서예가 학원에도 다니기도 하고, 또 소설 쓴다고 유명 일간지에서 신춘문예 선발하는데 응모하여 최종 선발 작품 몇 개에 들어 신문에 선발 후기에 오르기까지는 몇 번 있었지만 수상은 못했다. 그렇지만 나중까지 자기 자신은 소설가는 아니고, 시인이라고 자처했는데, 정확히 무슨 공부하러 미국에 가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San Francisco에 있는 유명 미술학교에 가서 MFA (Master of Fine Arts) 학위를 받았는데, 미술의 MFA는 일반 학과의 박사학위와 맞먹는다고 들었다.


둘째 누나도 이대를 다녔고, 유학은 안 가시고 결혼을 하셨다.


작은형은 서울 법대 출신이니까, 유학은 생각이 없었고, 고등 고시 합격해서 법관이 될 인생설계를 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대 후에 고시 시험에서 1차만 합격하고 2차 최종 시험에 낙방한 후, 큰형과 상의 후 큰형이 다니는 Ohio에 있는 Miami University로 가게 되었는데 scholarship 받고 갔는지 어쩐지는 난 잘 모르겠다.

큰형도, 작은형도 갈 때는 미군 배를 타고 갔는데 아마 어떤 장학 단체에 부탁하면 굉장히 싼값에 태워주었던 듯하다. San Francisco에 도착할 때 수중에 돈 50달러만 갖고 있었다고 들었다. 방학 때는 시카고 TV 공장에서 둘이 함께 일하면서 공부했다고 하니 그 고생이 얼마나 컸을지 나는 모른다.


나는 당시 대부분의 친구들처럼 대학 2년 끝내고 군대에 가서, 1년 반짜리 “학보”로 제대하고 학교로 다시 돌아오는 방법을 취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반 입대를 하면 “유학 제대”라는 제도가 있었기 때문인데, 10개월 만에 제대를 시켜주는 제도였던 거다.


그런데 내가 대학 졸업했을 때 징집영장이 나오지 않았다. 당시 인원이 너무 많아 40년 생은 군대에서 불러주지 않았다. 그리고 일 년이나 지난 후 1963년 봄에 돈 주고 자원입대해서 군대에 갔는데 가보니까, 그 사이 유학 제대 제도가 없어졌던 것이다. 유학시험은 합격했지만, 그래도 유학 가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어서, 제대 후 그냥 취직하고도 별로 아쉬운 생각이 없었던 것은 내가 공부하고 싶은 욕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Easy life를 택한 것은 내 원래 성품인가 싶다. 나는 형들이 유학생활 때 했을 고생은 할 결심이 없는 사람이라서, 스스로 미국 유학을 포기했던 것 같다. 형들이나 큰누나가 떠날 때 말로는 “어머니 잘 부탁한다”라고 인사말은 내게 했지만, 그것이 나 없으면 어머니가 생계를 못 이어서가 아니고, 그냥 인사말이었을 것이다.


군대는 반드시 거처야 하는 과정으로 생각했으니까, 기피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지만 막상 제2 훈련소 입대하니까 정말로 사람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철조망 넘어 오솔길이 저 산 위로 없어지는 바깥 풍경을 보며 저 산 넘어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군대 훈련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말은 아니라, 우선 먹고 싶은 것이 제일 참기 어려웠는데, 첫째는 고기가 먹고 싶었고, 둘째 설탕, 셋째 신선한 과일이 그리웠었고, 감옥생활같이 갇혀 사는 것이 싫었었다.


그래도 역시, 큰 사고 없이 전반기 훈련, 후반기 훈련 3개월을 끝내고 진짜 부대로 배치가 되어갈 때, 카투사 (KATUSA)로 미군 부대로 배속을 받게 되었다. 미 8군 사령부로 배속을 받았는데, 미 8군에서의 군대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왔었는데, 와 보니까 이건 완전 천국이더라. 우선 서울에서 근무하지, 일과 끝나면 외출해서 집에 들를 수 있지, 그것보다도, 고기 실컷 먹지, 설탕, 우유 무진장 마시지, 필요한 과일들 끼니마다 주는 것이었다.


정보부대에서 2개월간 보초 서다가, 8군 사령부 부관부 번역반이라는데 와 보니 보초 서거나 운전병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고, 군사 문서 번역하고 타자 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번역 반장은 한국군 대위가 하나 있지만 그 사람은 왔다 갔다 놀러 다니고 일은 4명의 사병들이 별도 사무실에서 다 하는데, 선임 하사관들 중 제일 선임은 나보다 경복고 1년 위면서 서울 문리대 졸업한 사람이고 둘은 시골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사대 출신이었고, 이건 군대가 아니고 고급 회사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내가 제일 “하발” 이였지만 2개월 만에 내 밑에 새로 뽑아온 신병들은 내가 지목한 사람들로 채우게 되었다. 번역일은 아무나 시켜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인원이 있으면, 신입 카투사 명단을 받아 그 학력을 보고, 지목하면 미 8군 사령부 책임 인사권자에 말하면 최우선으로 뽑아다 주었던 것이다. 또 일단 번역반에 오면, 18개월 임기 끝나면 한국군으로 복구시켜지는 어려움은 면제되고 제대까지 보장을 받았었다.


우리 내무반에는 미군 Sergeant first class가 내무 반장이고, 나머지는 일반 미군 사병 25명에, 한국군 KATUSA 5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군 사령부였기 때문에 졸병들도 비교적 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병들이었다. 지금은 미군이 월급을 많이 받고, 식대나 개인용품을 개인적으로 사서 쓴다고 들었는데 당시만 해도, 미군 월급은 그 액수가 적었고 대신 모든 필요품들은 군대에서 무상으로 지급해 주었다고 한다. 한국은 그들에게는 전장 근무로 여겨졌었는데, 그때 미군 친구들이 하는이야기로는 당시 군대 급식은 미국 중산층의 식사내용보다 훨씬 고급이었다고 했다.


여하간 내게는 미 8군 근무가 큰 도움이 되었다. 덕분에 영어를 가까이하게 되었고, 타이프 라이터 치는 법도 능숙하게 되었다.


제대 후에 무역회사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직장 생활하면서는, 다동 골목 속 중국집, 칼국수집, 설렁탕, 부민옥 (육개장) 등에서 주로 점심을 사 먹었는데 나중에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얼마 동안은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을 갖고 가서 먹기도 했다. 나 편하라고 "오리 벤또" (나무 도시락)한 개에는 밥, 또 하나에는 반찬만 둘을 갖고 가서 먹고 나서는 그 나무 도시락을 버리로 홀 가분히 왔는데, 집에서 싸주신 도시락이 어느 식당 반찬보다 푸짐해서 좋긴 했지만 나중에 어머니의 매일의 수고와 돈 액수를 생각해보니 그냥 사 먹는 게 이중으로 도움이 되는 것 같아 도시락 그만 싸시라고 하고 그냥 사 먹었다.


입사 후 1년쯤 지난 후 수출 판매부서로 옮기고는 해외의 buyer들, (구라파중 스웨덴이 주 수입국이었고 2–3년 후부터 미국이 수입하기 시작했다)과 점심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내 돈 안 쓰고 종은 음식을 먹었는데, 봄 4월쯤과 가을 10월쯤에는 매일 점심, 저녁을 손님 대접하느라고 식당, 서양식 restaurants, 한정식집, 요정 등등에서 잘 먹었는데, 아무리 잘 먹어도, 쉴 틈 없이 접대하다 보면, 몸이 무리해서 나중에는 코피가 나더라.


저녁밥을 술대접하고 같이하니까, 밤 10시 반 이후가 보통이고, 그 후 그 손님들 호텔까지 데려다주고 (물론 운전은 회사 운전기사가 담당했지만) 집에 가는 시간이 늦고 아침 출근은 제때 해야 했기 때문에 피로가 누적되었다. 수출 판매를 담당했기 때문에, 영어가 필수였는데, 내 위 과장, 부장들은 영어가 안 되어 영어를 쓰는 일은 주로 나만 하게 되었다. 열심히 하다 보니 당시로는 매우 힘든 특혜인 해외 판매 여행을 남들보다 훨씬 빨리하게 되었다.


1969년 이후 매년 약 한 달씩 출장을 다녔다. 스웨덴을 비롯한 구라파 사람들은 거래하는 데도 좀 동양식 인사 방법이 있어 여기 그 사람들이 왔을 때 대접하면, 내가 그쪽에 갔을 때 꼭 점심, 저녁을 대접받고 아침저녁 그 사람들 사무실과 내 호텔도 꼭 데려다주고 데리러 와주어서 머무르는 동안 교통비, 식비가 많이 절약되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외환 사정이 좋지 않아, 외국에 갈 때는 한국은행에서 달러를 바꾸어주는 허가를 받았는데 사장급이 아니면 당시 하루 일당 20불에 비상금 백 불 (한 달 출장 시 30일 X 20불 = 600불에 더하기 준비금 100불 해서 도합 700 불을 갖고 한 달 출장하는데 그때 우리가 신용카드가 있나? 개인 재산이 있어 암 달라 시장에서 달러를 살 형편이 되나? 꼼짝없이 700불로 한 달 출장 -먹고, 자고, 교통비 쓰고, 용돈 쓰고, 선물 사고 )로 업무를 다 보아야 했는데 당시 특급호텔이 하룻밤 15불 정도였고, 1불이면 호텔에서 continental breakfast 먹고 했으니까 호텔 등급을 좀 낮추어 가고 점심 저녁 얻어먹고, 교통비 안 들면, 구두 한 켤레 10불 정도 었으니까 구라파에서는 그런대로 지낼만했다. 미국에서는 그 출장비로는 혼자 택시도 타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힘들었다.




글쎄, 그 당시에는 여학생은 졸업하면 취직을 꼭 해야 된다는 생각은 없… 취업할만한 데가 많지 않았어. 공채가 거의 없었고 졸업 후 취업 거의가 알음알음으로 거의 들어갔을 거야.


사범대학을 졸업하거나, 3학년부터 교직과목을 들었으면 중, 고등학교 선생님으로 갔는데, 지금처럼 자격시험이 어려웠는지 그런 건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남학생들에게는 은행이 인기가 있었고. 또 무역회사가 인기였다.


나는 졸업 후 무역회사에 타이피스트로 들어갔지. 외국으로 보내는 “invoice”같은 것을 영문으로 타이핑했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충무로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아버지 직장과도 가까워서 점심도 같이 잡숫고 그랬지. 내 친구들은 무역센터 같은데 취직을 했는데, 2, 3년은 회사 다니다가 결혼한 것 같아. 하여튼, 그 당시에는 결혼하면 다 그만 다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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