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밴쿠버, 패션계에서 자리잡기
화려한 이벤트가 끝나고 회사로 돌아가 헌신을 하고 있었던 내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에는 토론토의 신문사인 ‘토론토 스타(Toronto Star)’에서 발간하는 무료 잡지인 ‘더 킷 컴팩트 매거진(The KIT Compact Magazine)’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원래는 토론토 지역에서만 출간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밴쿠버, 몬트리올, 에드먼튼, 캘거리, 오타와 등 캐나다의 주요 도시들로 발행 지역을 넓히기로 했고, 밴쿠버를 대표해 컨트리뷰팅을 해달라는 제안을 해 왔다.
이는 잡지에 기고하는 일이고, 내가 대표하고 있는 노드스트롬 스페이스를 홍보할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안을 승낙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한 달에 한 번 출간이 되는 매거진과 무료로 배포되는 ‘메트로(Metro)’ 신문에 들어갈 만한 패션 관련 컨텐츠를 주제에 맞게 쓰는 것이었는데, ‘이번 가을에 갖고 싶은 것 딱 한 가지', ‘밴쿠버에서 보내는 하루' 등 쓰기 어렵지 않은 화제로 구성되어 있어 부담이 크지 않았다.
2016년 9월부터 시작하여 애사심에 넘쳐 인센티브를 받지 않고도 무료로 회사 홍보를 해나가다가, 매거진 쪽에서 11월 호를 위해 에이치앤엠(H&M)과 겐조(Kenzo)가 하는 협업하는 컬렉션을 스타일링해서 입고 찍은 사진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늘 파리 패션위크에서 사진을 찍는 스트릿 사진작가를 섭외하여 사진 촬영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는 내가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쳐 회사에 무료로 퍼블리시티를 제공한 것에 대한 인정이나 이해는 온데간데없이, 노드스트롬의 경쟁자(?)인 에이치앤엠을 홍보하는 활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이해 충돌(Conflict of Interest)’이라는 제재가 걸리는 역효과로 작용하고 말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의 산호세(San Jose) 매장에서 밴쿠버로 새로 발령받아 함께 일하게 된 매니저는 내가 운영하고 있었던 소셜미디어나 블로그 들에 올렸던 글까지 내리도록 하는 등, 근로 계약에 없던 나의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제약을 걸어왔다.
처음 취업이 됐을 때 확실히 개인적인 소셜미디어인 나의 인스타그램에 내가 ‘노드스트롬'에 일하는 직원이라는 것을 명시하지만 않으면 아무 문제도 없을 거라는 확답을 받고 대외 활동을 계속해 온 것이었지만, 회사에서는 내가 미디어를 통해 가져다주는 혜택은 깡그리 무시한 채, 나의 개인적인 SNS 계정을 감시하며 '나 다움' 및 '개인적 존엄성'을 억제시키려는 듯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보그 매거진과 베르사체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회사를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해 왔고, 개인적이지만 창의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내가 속한 회사와 부서를 홍보하려 일 안팎으로 끊임없이 노력해 왔지만, 그런 나의 노력이 인정되기는커녕 늘 나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는 부작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니, 지난 몇 년 동안 애써 몸 담아왔던 패션계에서 완전히 질려버리고 말았다.
한 번 몰아닥친 패션에 대한 회의감은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멈추질 않고 작동했다. 일단 오일 업계에 이어서 가장 쓰레기를 많이 양산하는 패션 산업에 대한 미래가 희망차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 기본적으로 입고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의'만 있으면 충분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고, 패션계에 존재하는 화려한 의상 및 액세서리들 따위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필요하기는 한지에 대한 답을 쉬이 내리지 못했다. 200만 원이 넘는 면으로 만든 후드티, 2000만 원이 넘는 여우털로 만들어져 빨갛게 염색된 하트 모양의 재킷을 보며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버리는 나의 모습이 너무 주변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 같은 점도 옳지 않게 느껴졌다.
또한 패션계에 몸 담고 있는, 겉보기에 치장하기에만 바쁜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것도 고욕스러웠다. 머리와 속은 텅텅 비어있으면서 '디자이너'를 입는다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들, 돈이 많다고 직원을 천대하는 고객들, 고작 옷을 잘 입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 가격표에 따라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가지거나 차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계는 비교적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이기 때문에, 특별한 교육 과정 없이 소매업(retail)부터 시작해서 찬찬히 올라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어떤 이들은 '쇼핑'을 좋아하는 것을 자신이 대단한 '패션 전문가'라도 되는 양 착각하며 으쓱대곤 했다. 누가 옳고 그르다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없는 '주관적'인 분야인 패션계인 탓인지 예술이나 재능을 넘어서는, 돈으로 만들어진 인맥으로 좌지우지되는 형세도 마이너스 요인으로 다가왔다.
'남'이 한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을 통해 자주적인 삶을 이끌어 나가는 결정을 스스로 내려왔다고 자부해 왔고, 이는 어린 나이에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통해 혈혈단신 밴쿠버로 이민을 오게 된 큰 원동력이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버린 탓인지 가지고 있던 확고한 신념은 점점 얕아져만 갔고, 종국에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를 정도로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이 나를 사로잡아버리고 말았다. 마치 짙은 안갯속에 홀로 둥둥 떠 다니는 느낌이 들 때가 일쑤였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밴쿠버의 '패션계에서 일하면서 더 이상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이었다.
결국, 다음에 뭘 할지 플랜을 전혀 짜 놓지도 않은 채 노드스트롬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고 나서 근 2년 동안을 다시 소울 서칭(Soul Searching)을 하며 보냈다. 마냥 남미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어 비행기 티켓을 찾다가, 멕시코를 가자고 한국에 있는 친구를 꼬드기기도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저렴한 한국행 편도 티켓은 나의 마음에 불을 질렀고,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고국으로 돌아와 친한 친구들과 함께 소소하지만 소중한 시간들을 보내다 보니 번아웃 증후군과 우울함은 어느 정도 잦아들었다.
그렇게 예기치 않은 백수 생활을 하며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 저축해 둔 돈이 점점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압박감, '돈이 따박따박 나오는 직장' 등 가지고 있던 것들에 대한 미련, 그리고 정처 없이 방향을 잃고 헤매며 혹여 '백수 상태가 이대로 평생 유지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문득문득 불쑥 나타나 평온한 백수의 나날들을 어지럽혔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노드스트롬에서 일할 때 보다 훨씬 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매일매일 외식을 하던 습관을 버리고 직접 집에서 음식을 하고, 동네에 있는 예쁜 카페도 가고, 공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들러 못 읽었던 한국 책도 맘껏 읽다 보니 드디어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다시, 제대로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 나는 결국 패션계에서 은퇴하기로 마음 먹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