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밴쿠버, 패션계에서 자리잡기
그러던 어느 날, 내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믿지 못할 이메일이 한통 도착했다. ‘보그 매거진(Vogue Magazine)’ 뉴욕 본사에서 밴쿠버에 곧 오픈할 ‘베르사체(Versace)’ 행사를 하는데 나를 이벤트를 주최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처음에는 스팸 이메일인가 싶을 정도로 어벙벙했지만, 이메일 답장을 통해 곧 밴쿠버로 오게 될 베르사체의 마케팅 부사장과의 미팅이 잡히게 되었다.
개스타운의 한 커피숍에서 베르사체 마케팅 부사장인 ‘마티(Marti)’와 함께 첫 만남을 가졌다. 짧은 스포츠 헤어에 목까지 올라오는 터프한 문신이 인상적이었던 마티는 패션 회사에서 일해서 그런지 상업적 패션의 메카인 뉴욕을 기반으로 일하고 있어서인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부사장'의 느낌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밴쿠버는 처음이라는 그에게 갈 만한 곳을 추천해주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티를 통해 새로 오픈할 밴쿠버 베르사체 스토어 및 어쩌면 같이 주최할 이벤트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 이벤트는 보그 매거진과 베르사체의 협업의 일종으로, 보그 매거진에 광고를 실어주는 것에 대한 답례의 개념으로 두 브랜드 모두에서 홍보 및 예산이 집행되는 이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함께 다른 3명이 이벤트를 주최하는 ‘주인(Host)’이 되어 베르사체 매장에서 열릴 이벤트에 올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벤트 후 따로 열릴 단독 프라이빗 디너에 함께 할 사람을 두 명 정도 선택해주는 것을 대가로 베르사체에서 시가 $2,500불(약 200만 원)에 달하는 가방을 선물 받는 것으로 계약을 진행하기로 하고, 마티와의 미팅을 마쳤다. 보그 매거진 뉴욕 본사와 베르사체 브랜드와 함께 일하는 영광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꿈같은 일이 내게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노드스트롬에 취업이 되어 있었던 상태였던 나는, '말'로는 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내가 잘못하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던 상사가 눈을 부릅뜨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 없는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을 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고, 이 부분을 조심해서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티와의 미팅 다음 날, 인사 부서 매니저를 만나 이를 확인하기로 했다. 미국 덴버 주의 콜로라도 출신인 키가 크고 시원시원한 미소를 가지고 있는 인사부 매니저는 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들은 후, “보그 매거진과 베르사체와 함께 일 할 수 있는 것이 아주 큰 영광이기는 하나, 내가 현재 노드스트롬에서 주급을 받는 피고용인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회사 방침에 대해 조곤조곤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내게 알려주었다.
정말 좋은 기회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내가 소속해 있던 회사, 노드스트롬에 남는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단발성으로 끝날 이벤트보다는 계속해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잡아야겠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내게 연락해 준 보그 매거진 쪽에 내가 처한 상황과 내린 결정을 알려야 했다. 인기 스타 비욘세(Beyonce Knowles)와 같은 성(Last Name)을 가진 그는 나의 상황에 감정 이입을 해주며 주최자로서는 아니더라도 내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그랜드 오프닝과 프라이빗 디너 이벤트에 참석해줄 수 있겠냐고 친절하게도 물어와 주었다.
그렇게 하여 비록 공식적으로는 이벤트를 주최하는 자리에서는 물러났지만 손님으로서 이벤트를 즐기려는 마음으로 깔끔하게 차려입고 이벤트 당일, 새로 생긴 베르사체 매장에 도착했다. 뉴욕 보그 매거진에서 온 두 명의 에디터들과, 밴쿠버를 대표하는 4명의 호스트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내가 초대한 사람들과 함께 화려한 스토어를 구경하고 샴페인을 마시며 재미난 시간을 보냈다.
재미있는 것은 공식적인 사진작가로 ‘게티 이미지(Getty Image)’에서 이벤트 사진을 찍어갔는데, 비록 내가 오피셜 한 주최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름이 등록되어 있어 마치 내가 이 이벤트를 주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단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베르사체에서 주는 가방을 못 받았을 뿐이었지만 평소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는 편이라 전혀 개의치 않았고, 나를 호스트처럼 살뜰히 챙겨주는 보그 매거진과 베르사체 팀에 고마운 감정만이 내 마음 한편을 물들였다. 매장에서 열리는 첫 번째 행사가 끝나고, 리무진을 타고 내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인 ‘라바토아(L’abattoir)’의 프라이빗 룸에서 내가 초대한 손님 및 다른 호스트와 그들의 손님, 보그 매거진 에디터들 및 베르사체 팀과 함께 따로 저녁 식사를 멋지게 마무리하는 것으로 믿을 수 없는 하루가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