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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림 Aug 04. 2024

한 여름밤의 산책길 풍경

여름의 끝이 찾아오는 날은 알고 있다

‘나와 산책 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여름의 시작은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여름의 끝이 찾아올 날은 분명히 알고 있다.

모두가 떠난 도시의 밤은 어둡다.

밤길을 홀로 걷는 짧은 여름 산책길을 나선다.

숨 막히는 열기로 덮인 한 도시 속에도 살짝 흥분하며 기다리는 건 ‘밤길을 걷는 산책’이다. 

그래도 서늘해진 기온에 홀로 걷는 느긋한 휴식이자 온전히 자유시간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깊어가고 무더위가 시작되면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공원으로 향한다.

해 진 깊은 저녁시간이 지나면 공원을 거슬러 근처 동네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휘젓고 다닌다.
집을 나서 숲이 울창한 공원 근방을 기표로 굳이 한 곳만이 아닌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떠돈다.


공원을 지나 걷다 보면, 값 비싼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선다. 

갑자기 장대 비가 내려, 자동차 경적 소음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경비실 입구 쪽에 몸을 밀착시킨다. 

어! 반쯤 가려진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난다. 

거기에 김치찌개와 진득한 감자볶음이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 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오래된 가스레인지와 넓은 싱크대가 얼핏 보였다. 

뚝배기에선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도마엔 채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 


위로 고개를 돌리니, 2층 쪽에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초등학생 정도의 솜씨인 듯, 입문용 리듬인인 “솔도 미솔도 미레 레도”라는 익숙한 멜로디다. 

유년기 시절 동네 음악학원의 열린 창 너머로 흘러나오던 익숙한 곡이다. 

소녀의 여린 연주일까! 

아니다, 어쩌면 소년의 연주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상 공간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밥 짓는 내음과 

피아노 소리가 있는 그 장면에 콧소리로 따라 흥얼거리며 천천히 걷는다.
 
 

같은 골목 끝엔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떡볶이와 주먹밥, 라면과 덮밥을 파는 분식집엔 

저녁강의를 끝낸 근처 대학교 여대생들에게 

떡볶이와 라면에 시끌벅쩍하게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모퉁이를 도니 가락국수 소바집이 나온다. 

얼핏 보기에도 오래된 가게는 아닌 듯, 일본식의 작은 소도구와 인테리어로 ‘마니아’ 취향의 분위기로 아기자기하게 단장한 조그만 식당이다. 

항상 지나칠 때면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었던 가게였다. 

국물 맛이 끝내주거나 면발이 기가 막힐 것 같아서라기보단 유학시절 즐겨 먹었던 여름밤에 냉가락국수 한 그릇 하는 경험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다. 


하지만 그쪽을 지날 즈음엔 대개 저녁밥을 먹은 뒤였다. 

분식은 김밥 한 줄이면 배가 차는 나로서는 야참으로 가락국수까지 후루룩 해치우는 건 아무래도 무리였다. 허지만 추억을 느끼고 싶어 가게 문을 밀고 들어서니 입구 쪽 테이블에서 어학원 마칠 시각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온 듯한 주부 두 명이 카레 돈가스와 가락국수를 나눠 먹고 있었다. 

조명 위의 스피커에선 지난 그 시절의 익숙한 멜로디인 시티팝이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진한 다시마 육수에 갓 튀긴 새우 2개나 올려진 ‘관서식’ 가락국수를 오랜만에 맛보며 지난 시절을 느낄 수 있었다.  때론 “음식에 곁들인 음악이 잊힌 추억을 새삼 느끼게 하는구나”라고 상념에 잠기게 하는 순간이다.


공원 언덕 아래까지 제법 멀리 내려간 다른 골목을 걷다 아담한 교회에 닿는다. 

주일학교 여름 캠프 준비 중인지 평일 밤인데도 광장에는 소년, 소녀들로 북적북적했다. 

담길 옆으로 보이는 창안으로 비친 색종이로 오려 붙인 듯한 벽면 글자들이 삐뚤빼뚤 사랑스럽다. 

건너편 방안엔 중 고등부로 추정되는 학생들이 손을 들어 올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유리창 너머로 본다. 

학생 시절 다녔던 시골교회의 지난 추억이 시간을 거슬러 옷자락 안으로 스미는 기분이었다. 

아! 내 첫사랑도 거기에 있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돌아서 언덕길을 오르니, 

수제 햄버거 가게 주인장이 문 닫으면 듣는 노래가 바람결을 타고 내 심경을 반영한다. 

아마 한 10년 전쯤에 즐겨 들었던 ‘빗물샤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이제 산책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찬물샤워를 할 시간이다. 

흐르는 이마 땀은 훔치며 집으로 빠른 발걸음을 재촉한다.

이제 누군가를 가르치는 강의도 종강이고, 

하고 싶었던 게 많던 무모한 열정도 이제 끝이 보인다. 

곧 급한 일도 없어질 터이니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도 걸어보아야겠다.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함께 오르는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한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발길 닿는 대로 가고 싶다. 

노란 둥근 달빛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밤이기 때문이다
이제 공원 언덕자락 숲 속에 이 깊은 시름은 남겨두고 집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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