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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Nov 10. 2022

살다가 보면 넘어질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오늘이 그랬다. 일손 돕기를 나간 밭 주변에는 낮은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종아리 정도 높이라서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넘었는데 운동화에 울타리 줄이 걸려 고꾸라지고 말았다. 어느새 나는 밭두렁에 얼굴을 대고 넘어져있었고 입안에서는 흙 맛이 났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고를 친 것도 민망하지만 맥없이 넘어진 것이 더욱 창피스러운 순간. 한 겨울 눈길에서 넘어지면 아픈 것보다 주위 시선이 민망해 벌떡 일어나 아무렇치도 않은 듯 걸어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서둘러 차로 돌아가 거울을 보니 왼쪽 뺨에는 흙이 잔뜩 묻어있고 턱 밑과 뺨에는 찰과상이 생겼다. 휴지로 천천히 닦아내고 민망해 마스크를 쓰고 밭으로 돌아왔다.


내일쯤이면 아마 상처 부위가 붓고 멍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창피함보다 이틀 후와 주말에 예정된 행사가 걱정스럽다. 아마도 그때까지 상처가 가라앉지 않는다면 부득이 마스크를 써야 할 것이다. 늘 사고는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때 울타리를 넘지 않고 몇 발자국만 걸어 돌아갔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하는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었으니 소용없는 일이다.


살다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는 이근배 시인의 시구가 떠오른다.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지고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이고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하며 우리는 산다. 시인의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 떠나보내기도 하고 떠나보내지 않을 사람을 떠나보내고 어둠에 갇혀 살기도 하는 것이다. 


오히려 오늘 같은 넘어짐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라 당황스럽지만 일주일 남짓 지나면 상처는 아물고 붓기 또한 가라앉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는 넘어질 때는 삶의 과정에서 실의에 빠지거나 아주 헤어나기 어려운 고난일 것이다. 며칠 전 결혼식에서 남동생이 누나에게 했던 축하의 말처럼 살다 보면 힘든 일은 분명히 있겠지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길 바란다는 말처럼 우리 삶 또한 그랬으면 하는 마음이다.


넘어진 탓인지 두 시간 남짓 쪼그리고 앉아 마늘을 심은 탓인지 다리가 풀린 것처럼 몸 또한 늘어지는 오후. 동료가 사다 건넨 멸균 반창고의 효능을 기대하며 삶에 대해 한번 더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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