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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Feb 16. 2023

청혼


노란 불빛이 나는 앙증맞은 초는 하트 모양으로 늘어서 빛을 발하고 붉디붉은 장미꽃잎이 꽃길처럼 펼쳐져 있다. 무심한 얼굴로 차 트렁크를 여는 순간, 나의 사랑을 꼭 받아달라는 글귀가 쓰인 현수막과 헬륨풍선이 사뿐히 솟아오른다. 알면서도 모른 척 살짝 눈을 감고 있던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거나 깜짝 놀라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TV나 영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청혼을 연상하는 장면들이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중략)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화요일 저녁 온라인 시낭독 수업. 이번 주 함께 읽는 시는 진은영 시인의 <청혼>이다. 제목부터 박꽃처럼 환한 설렘이 묻어있지만 수업 준비를 위해 눈으로 대충 읽고 출력했을 뿐 무덤덤했다. 사랑 고백하는 내용이구나 하며 읽다가 마지막 행에서 '슬픔'이란 단어가 언급되어 살짝 당황스러웠을 뿐이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선생님은 시에 대한 느낌을 물으셨다. 수강생 나이가 대략 40대에서 70대까지 다양해서인지 반응도 가지각색. 음색이 너무 정직하다는 말을 듣는 이는 어김없이 '시가 오글거린다'라고 말했다. 목소리가 곱지 않지만 시를 읽을 때 진정성이 묻어나는 70대 수강생은 사랑스러운 시라며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 감성보다 이성지수가 조금 더 높은 나는 사랑 고백의 시인가 하며 읽다가 마지막 행에서는 좀 당황스러웠노라고 답했다.


며칠 전 저녁 TV를 보던 남편이 담담한 목소리로 "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네"라고 말했다. "아, 그런가"하며 날짜를 헤아리다 "내일이 밸런타인데이니까 오늘이 맞네"라고 답하고 이내 말했다. "그럼 나 선물 줘야지"라고. 이에 남편은 "왜 나만 줘야 하는데"라며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거실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썰렁한 공기. 생일이나 다른 기념일은 챙기는 편인데 매번 밋밋하게 그냥 지나치는 날이 바로 결혼기념일이다. 아마 처음부터 안 챙긴 탓인 듯한데 덕분에 그동안 제대로 기념한 적이 없다. 한술 더 떠 "기념까지 하면서 챙기고 싶지 않은 날인데"라며 우스개 소리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겼던 통과의례 중의 하나였던 결혼.  유행가 가사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라며 노래로 부를 만큼 거추장스러운 절차, 필수가 아닌 선택, 아니 별로 달갑지 않은 숙제로 치부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져 한껏 부풀었던 행복한 관문을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과 의무로 여기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아니 때가 되면 자연스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를 것이라는 기대 또한 구태연한 생각이다. 20대 중반이 된 아들도 결혼은 물론 아이에 대해서도 긍정적이지 않다. 특히 아이 자체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는 듯 해 '내 자식'은 이쁘고 사랑스럽다고 과장된 표정으로 설득해 보지만 뜨악한 반응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청혼>이라는 시에서 그는 오래된 거리처럼 나를 사랑한다. 뜨겁지도 않고 설렘도 없는 밋밋한 느낌인가 싶지만 어쩌면 익숙하고 편안한 관계라는 의미일 것이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겠노라는 말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주겠다는 지키지 못할 헛된 약속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또한 인류가 아닌 단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다고 다짐하며 우리 앞에 분홍 및 미래뿐 아니라 예기치 못한 슬픔 또한 함께 할 것이라며 현실을 일깨워준다


시에 대한 느낌을 말하던 한 수강생은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겠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비록 지키지 못할 약속 이언정 사랑하는 이에게 기분 좋은 말을 해줄 수 있는 순간이 그때가 아니면 언제이겠는가. 못 지킬 약속으로 나를 속였다며 평생 잔소리감으로 써먹을 확률은 높아지겠지만 말이다. 서로 부대끼며 살아갈 날에 기쁨과 꽃길만 펼쳐질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지만 슬픔 또한  떠올릴 수밖에 없는 현실. '하늘에 있는 별도 달도 다 따주겠다'는 절대 불가한 약속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작은 허풍이나 아첨정도는 해주면 어땠을까.


그냥 지나가긴 아쉬워 달큼한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초를 꽂는 것으로 대신하고, 화려한 이벤트나 번드르르한 아첨 한마디 없던 그날을 떠올린다. 기념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아첨을 기대하는 아이러니한 내 마음의 이중성이 궁금해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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