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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Jul 24. 2022

불미나리와 시금치

외로움의 무게

봄나들이를 안 나서면 유죄가 될 것 같은 4월 주말, 시누이들과 점심을 먹고 시댁으로 향했다. 며칠 전 살짝 넘어져서 병원에 다녀오셨는데 약을 먹어도 여전히 옆구리 통증이 있다는 어머니의 통화가 마음에 쓰인 탓이다. 엑스레이에 나타나진 않지만 실금이 간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하며 시누이들은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다. 


배꽃이 피기 시작한 시골은 고요하다. 젊은 사람이 거의 없고 70대 이상 노인인구가 대부분인 마을. 가끔 닭 우는 소리만 그 정적을 깬다. 뻑뻑한 대문을 밀고 집안에 들어서니 느린 눈빛으로 밖을 내다보는 어머니 모습에 마음이 짠해진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손길이 느껴지는 마당 텃밭에는 마늘, 양파, 시금치, 대파가 자라고 있다. 도착하자마자 시금치와 대파를 챙겨가라는 말에 형님이 이내 여린 시금치를 솎아내는 일을 시작한다. 거의 마무리될 때쯤 집 근처에 불미나리 서식지가 있다는 어머니 말씀에 노곤해져 졸고 있는 나를 제외한 3남매가 장화를 신고 소란스럽게 나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소쿠리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양의 불미나리를 들고 들어온다. 문제는 뻘에서 자란 미나리를 다듬는 일이다. 고민도 잠시 따스한 봄볕이 내리는 마당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뿌리와 시든 이파리를 떼어내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에도 여전히 아픈 기색이 역력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 톤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화색이 돈다.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시어머니는 오래도록 농사를 지었고 아들이 결혼하면서 손자 둘도 잘 키워주셨다. 내가 좀 힘들면 자식들이 더 편하다고 생각하시는 탓에 웬만하면 싫은 소리도, 서운한 내색도 안 하시는 편이다. 늘 자식들의 행복과 건강이 최고라고 여기시는 것이다. 마트에서 몇 천 원만 주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불미나리와 시금치 손질은 한 시간여 동안 계속됐고 쓸쓸함이 가득했던 집안은 훈훈한 온기와 웃음으로 들썩였다. 불미나리를 거의 다듬어갈 즈음 어머니는 들에 쑥이 지천인데 그것도 뜯어가면 좋겠다고 말씀하신다. 이미 시골집에 도착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났고 쑥까지 뜯고 다듬으면 해가 저물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이내 딸들은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다음을 기약한다. 


 쑥까지 뜯어 갖고 가라는 어머니 제안은 당신 곁에 조금 더 오래 자식들이 머무르기를 바란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자식들이 자주 전화를 드리고 찾아뵙지만 평소 혼자 지내면서 느끼는 외로움의 무게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일 것이다. 벌써 대공이 나오기 시작하는 대파 한 다발, 싱싱하게 자라 입맛을 돋게 할 야생 불미나리, 따스한 바람과 햇살을 받으며 자란 푸릇한 시금치가 봄을 더 향긋하게 느끼게 하는 주말 오후. 어머니는 떠날 준비를 하는 자식들에게 매년 뜰 안에서 꽃을 피우던 나무 한그루가 말라죽었다며 다음에는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미션을 미리 주신다. 곧 다시 보면 좋겠다는 말이다. 아파서 움직이기도 어렵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밝고 씩씩해진 어머니 모습이 다행스럽지만 썰물 빠지듯 다 떠나고 나면 집안은 곧 적막해질 것이다. 떠나는 자식들의 뒷모습을 못내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흔드시는 모습이 오늘따라 우수수 떨어져 변색된 목련 꽃잎처럼 애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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