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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숙 Aug 31. 2022

그땐 그랬었지

명절 단상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신작로 길을 달리는 시외버스를 타면 멀미가 더 심해졌다. 덜컹거리는 차 안의 풍경은 기억도 나지 않지만 지금은 자가용으로 이동하면 40분 정도 거리를 버스를 타고 가면 몇 시간이 걸렸다. 멀미가 심해서 늘 옷을 버리곤 해도 아빠는 큰딸을 꼭 데리고 명절을 쇠러 가시곤 했다. 7남매가 북적거리는 큰집에 가면 두 살 터울 언니를 비롯해 동생들과 밤새 깔깔대고 가끔은 그 동네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와도 어울려 놀았던 날들이 아슴하게 떠오른다. 작은집이라 차례를 모시지 않았지만 음식을 만들고 이웃들과 나눠 먹기를 좋아하는 엄마 덕분에 명절에 큰집을 가지 않아도 맛깔스러운 잡채를 비롯해 동태전, 산적 등 다양한 전과 음식들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종갓집 외아들인 남편과 결혼하면서 연초부터 줄줄이 이어지는 제사와 명절 차례, 시제까지 도맡아야 했다. 명절마다 큰집에 따라다녔던 추억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특별한 날로 기억하던 명절은 차례를 지내고 6명의 시누이와 가족들을 접대하는 날이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음식 종류가 다양하지 않고 갈비찜만 푸짐하게 해서 대접해도 다들 맛있게 먹어준다는 것이었다. 친정이 시댁과 근거리에 있고 평소에 자주 가면서도 명절엔 조금이라도 정해둔 시간보다 지체되거나, 친정 갈 채비를 다 마쳤는데 시댁 식구들이 들이닥치면 심기가 불편해지곤 했다. 친정에 가서도 형제들이 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안절부절못하는 남편 때문에 짜증을 부린 날도 있다. 그렇게 가끔 옥신각신하던 시간들도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교통정리가 되었다. 웬만하면 시댁 식구들도 서로 시간을 맞춰서 비슷한 시각에 도착해 번거로움을 덜어주었고, 나도 친정에 가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어도 짜증을 내기보다는 그러려니 하고 마음을 내려놓는 단계에 이르렀다.      


 명절을 앞두고 벌초를 하는 것도 부담이었다. 외아들에 종손이다 보니 고조, 증조에 이르기까지 윗대 어른들의 묘소를 돌보고 깔끔하게 챙기는 것도 큰 숙제였다. 남편은 예초기를 들고 반나절 내내 땀을 흘리고 나서 손을 달달 떨었고 혼자 보내는 것이 안쓰러워 뒤를 따라다니며 갈퀴질로 보조한 것이 10여 년. 운동장만 한 큰 묘소 관리가 쉽지 않아 지면서 종중에서 뜻을 모아 납골당을 조성하면서 지금은 명절이 돌아와도 그나마 벌초 걱정은 덜게 되었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명절을 보내는 방식 또한 확연히 달라졌다. 음식을 장만하고 대접해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는 수많은 며느리의 희생과 눈물 덕분에 오랜만에 북적북적하던 집에 활기와 온기가 돌고 기름 냄새가 번지던 풍경도 단출해지거나 아예 건너뛰고 여행을 떠나는 집이 많아졌다. 방역을 위해 모임 인원이 제한되면서 한꺼번에 모였던 가족들은 날짜를 정해서 따로 모이거나 아예 각자 집에서 명절을 보내기도 한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시누이들은 미리 시댁에 다녀가거나 전화로 안부를 대신하게 되고 당연히 준비하는 음식의 양과 종류도 줄었다. 음식을 준비하고 쌓여있는 설거지 그릇들을 보면서 한숨을 쉬기도 하고 투덜거렸던 시간들도 어쩌면 그땐 그랬었지 하며 추억하는 아련한 기억들이 될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새로 산 운동화와 설빔에 설레었던 어린 시절 명절 풍경을 떠올리다 보니 멀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늘 큰딸을 데리고 명절을 쇠러 다니시던 아빠의 환한 모습이 그리워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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