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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읽고-2장

by 모도리

2장의 키워드 : 책은 과거에 써졌지만 그 과거라는 것이 알고보면 지금이지 않을까?


- 2장에 대한 에필로그

항상 책을 읽을 때 첫 장은 책에 빠져드는 시간이 된다. 한 글자 한 글자, 한 문장 한 문장 읽으면서 내가 책이 되고, 주인공이 되어 2장을 상상하며 읽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턱 막히는 것이 있다. 바로 언어이다. 사투리나 외국어가 나오면 익숙하지 않으니 그게 입에 익을 때까지 읽고 소리내어 말하곤 한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강화도 사투리가 나온다. 처음 듣는 사투리가 여러 번 고쳐 읽고, 소리내 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석모도의 석양을 등지고 이야기를 하는 듯 한 착각을 하곤 했다. 1장을 통해 책에 온전히 들어간 것을 느끼고, 그러면서 등장하는 인물들과 대온실의 상처에 주목하게 된다. 2장을 들추었을 때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감탄과 약간의 질투심, 그리고 그들의 상처를 대면하려는 용기를 얻으며 읽기 시작했다.

- 기억에 남는 문장

64쪽 칠판이나 담장 같은 아이. 어쩌면 아이는 트라우마는 겪고 있는지도 말랐다. 그런 일들은 외부의 두드림에도 응답을 내놓을 수 없는 심한 무기력을 만들어내니까. 나는 서울에서 돌아온 이후 내가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89쪽 그 벽은 낙선재 누마루 아래 있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특이하게도 깨진 얼음 모양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궁이 불씨를 막는 화방벽으로 화재를 예방하려는 바람을 담아 얼음을 새겨넣었는데 마치 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불길을 덮으려는 깨진 얼음들이 어딘가 조선의 역사를 생각하게 한다고, 저마다 갈라진 운명이라 다시 하나로 맞춰보기 어려울 정도로 나뉜 세계같이.

67쪽 산아가 그림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연필선이 흐릿해서 산아와 나는 화면을 확대해 살펴봐야 했다. 두 개의 원에서 선들이 양쪽으로 뻗어나와 있고 아래 동그라미는 연필선으로 채워져 있었다.

68쪽 “그럴 리는 없어. 사실 마마무는 쇠기러기 떼 때문에 여기로 오는 거거든.”

“왜?”

“잡아먹으려고 그러니까 살고 싶어서라도 올 거야 꼭.”

나는 그런데 왜 마마무를 그려줬냐고 물었다. 산이는 그냥, 하고 얼버무리더니 “가장 용기 있으니까”라고 속내를 내비쳤다.

79쪽 직원들이 일어나 무채색 고궁 담장들 위에 만들어지는 빗자국들을 지켜보았다.

“이런 풍광 보면서 일하시면 좋겠다. 차분하고 조용하고.”

108쪽 “너, 서울 온지 몇 달인데 대학로도 안 와봤어?”

“대학로는 대학생들만 가는 데 아니예요?”

내 말을 들은 언니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종로는 종들만 가냐?”

115쪽 그는 또 폐휴주의라는 다소 급진적인 원칙을 주장했다. 말 그대로 휴일을 없애는 것이었다. 식물은 매 순간 생장과 발육을 멈추지 않는데, 그것을 다루는 인간이 때마다 쉬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118쪽 “왜 사람들은 다 그렇게 너무 좋아하는 게 생겨버리는 걸까? 엄마도 돈이면 다 좋다고 하고 오빠는 게임만 하고 이모도 그런 게 있어?”

나는 생각을 더듬었다. 좋아하는 상태를 더 심화시키는 ‘너무’라는 부사를 사용해본 적이 있는지를.

122쪽 “너무 마음이 아프면 외면하고 싶어지거든. 아까 우리도 말했지? 너무를 조심하자고.”

“맞아, 죽으니까.”

“아니, 그 사람 안 죽었어. 1927년에 죽었으니까 죽긴 죽었지만 그렇게는 안 죽었어.”

읽은 소감

책에 녹아 들어 가고 있는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글의 형태를 보면서 과거-현재 그리고 대온실 수리 과정이 자연스럽게 어우려져 있어서 그런지 더욱 더 흥미진진하다. 아직은 과거의 이야기에 더 빠져들어 있지만 말이다.

이 번 장에서는 산이와 스미의 이야기, 그리고 외할머니와 낙원하숙 할머니의 만남 이야기, 리사와의 관계에 대한 과거와 창경궁 직원들과의 대화가 나온다. 모든 이들의 모습이 행복보다는 상처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애써 보이지 않으려고 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들이 있다. 치유될 수 있는 상대를 만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산이와 스미는 서로 어떤 그림을 그려 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뒤에 나온다. 처음 스미가 그려 준 그림을 설명해 줄 때 사실 파리나 모기라고 생각했다. 스미 자신을 나약하고 힘이 없지만 누군가에게 꼭 복수하고 싶은 대상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면서 방황하는 모습을 나타나기에 딱이라고 생각해서 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벌이라니. 다만 벌에 대한 추억은 좋지 않았지만 혼자 덩그러이 앉아 벌을 보며 자신의 처지와 비슷하여 연민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가 되었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고 난 빈 교실에서 창 밖의 사계를 보며 사진을 찍어 둔 것들이 있다. 조용하면서도 고즈넉한 그 고요함이 빗속에서, 눈발이 날렸을 때, 해가 지는 모습이 모두 하나의 그림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걸 나만 즐기기가 아쉬워서 아이들과 함께 방과후에 자주 보게 되었다. 역시 왁자지껄해서 제대로 그 감흥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건 그대로 마음에 와 다았다. 어쩌면 창경구의 직원들도 고즈넉한 곳에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겨움과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닌가 한다.

‘폐휴주의’ 처음엔 제대로 읽지 못해서 폐지인줄 알았다. 다시 읽고 나서 하루도 쉴 수 없다. 식물이 자라는데 그걸 놓칠 수 없다라는 그 말에 동의해 버렸다. 아이들과 지내면서 방학이라고, 주말이라고 해서 아이들과 소통하지 않은 날들은 거의 없었다. 어딘가로 함께 가기도 하고, 심심하다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조금씩 생기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가정이 생기면서 먼저 약속과 일정을 잡고 지금은 만나지만 말이다. 어쩌면 교사라는 직업의 숙명이 온전한 쉼이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내가 이렇다고 다른 이들에게도 강요하거나 권유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왜 모두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고 한 걸까? 이럴 때 쓸 수 있는 말이 ‘너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선재아궁이벽(트위터_창경궁제공).jpg 창경궁 아궁이벽 빙렬 [창경궁제공]

갑자기 창경궁 아궁이벽과 일제강점기 당시 창경궁 관리들의 사진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이리 저리 찾아봤지만 창경궁 낙선재의 낙선재의 본채 누마루 밑에는 있는 특이한 문양인 빙렬만 창경궁에서 제공한 사진에서 찾게 되었다. 누마루 밑이 다름아닌 불을 넣는 아궁이가 위치해 있어 부디 불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조상들의 간절한 마음으로 만든 곳. 학교나 교실에서도 그리고 사회에서도 일어나는 수 많은 아픔 소식들을 들으며, ‘그들을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빙렬과 같은 걸 만들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책 문장 하나 하나에서 지금 처한 나의 모습를 보니 신기하기도 하면서도 근래 서글픈 일들이 일어나니 아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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