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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 공존을 위한 단상

우적동 봄을 그리다(28)

by 정영호

우적동은 승달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마을이다. 거의 대부분이 숲이다. 골짜기를 따라서 다랑치 논 몇 배미가 있으며 산밑자락에 넙덕치만한 밭들이 아주 조금 있다.


어릴 적에 숲은 우적동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 바람을 타고 마을사람들은 산에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리고 대밭도 많았고 전라도 말로 장두감이라 부르는 대봉감나무도 더러 많았다.


어릴 적엔 우적동이 밤골로 불리었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밤수확에 정신이 없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학교가 끝이 나면 부리나케 집으로와 부모님의 밤수확을 도왔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목포에서 밤장수가 5톤 트럭을 끌고 와 한가득 밤을 사갔다.

엄마들은 저녁에 벌레 먹은 밤을 깎아서 삶아 통학열차를 타고 목포 도깨비시장에 나가 팔아서 식구들 반찬을 사 오셨다.


숲에 대한 또 다른 어릴 적 기억은 땔감 나무였다. 구들방에 유일한 난방방식은 나무를 불태우는 것이다. 나무하기는 늦가을부터 시작되어 이듬해 봄까지 계속되었다. 아버지는 장작을 준비하셨고 어머니는 갈퀴나무라고 하는 마른 솔잎을 모으셨고 아이들은 죽은 나무 끌텅들을 모으는 일을 했다.

따뜻하게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나무를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의 평수를 작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많은 식구가 좁은 방에 모여 함께 지냈다.


그러던 어릴 적 숲에서의 추억은 쌍팔년 이후 90년대에 접어들어 연탄과 기름보일러가 보급되면서 막을 내렸다. 산에 심었던 밤나무는 늙어 병이 들어 대부분 죽어갔다. 그 이후 사람들은 밤농사를 포기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숲에 들어갈 일이 사라져 갔다. 그러다 IMF 이후 물가가 치솟으며 기름 대신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는 화목보일러가 들어오면서 또다시 숲으로 나무를 하러 들어갔다. 나 또한 결혼 후 10년 넘게 화목보일러를 사용했는데 돌아놓고 생각하니 그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화목보일러는 구들과 달리 열효율성이 매우 떨어진다. 참나무류의 화력이 좋은 나무들만 필요로 했기에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효율성이 없는 화목보일러를 스스로 용도 폐기해 나갔다.


요즘 대형산불을 보면서 우적동 숲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다행히 소나무 비율이 낮다. 대신 참나무 밤나무 벚나무가 많다. 수종이 다양해 다행히 산불에 취약하지는 않다. 하지만 민가가 너무 숲에 가까이 있다. 산불이 발생하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다.


산불은 예방만으로는 근절이 어렵다 여긴다. 그렇다면 산불이 발생했을 때 완충지가 필요하다. 소나무 위주의 숲을 활엽수를 심어 일차 완충지를 만들고 다음은 30년을 주기로 벌목과 재조림을 진행하면 다시 완충지가 확보된다. 또 하나의 방법은 민가 주변에 염소와 소의 방목초지를 조성하는 것이다. 민가 주변의 방목초지는 산불이 발생했을 때 아주 좋은 완충지 역할을 할 수 있다.


논과 밭을 방목지로 만들어 소를 키우고 있다. 겨울철에는 라이그라스를 키우는데 산불이 발생하는 봄철에 생풀이 자라 산불을 막는 훌륭한 완충지가 된다.

나의 이런 고민은 십여 년 전부터 신문에 칼럼으로 정책적으로 제안된 내용이다. 또 수많은 전문가들이 숲을 방치하는 정책을 그만두고 다양한 활용정책을 제안했지만 정치가 이를 거부하고 있다.


정치는 늘 국민에게 별 관심이 없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고 봄이 오는데 세상은 더욱 사악해지고 있다. 우리가 믿는 민주공화국 안에서 타협할 수 없는 단계라면 그다음은 피바람이 이는 전쟁일진대? 올봄은 사악하기 그지없다. 법은 이미 무너졌고 억지와 폭력만이 난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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