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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양인들이 한결같이 경험하는 명상의 효과, 감사

by 은종


캐나다에 살면서 한국어로 학위 논문을 써야 했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곧 10년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UBC에서 주는 도서관 카드로 선에 관련된 모든 키워드를 넣어서 세계적으로 선에 관한 연구 동향을 파악했다. zen, seon, chan. 일본과 한국, 중국에서 다른 단어를 썼다. 선에 관한 학위논문과 저널에 실린 논문들을 검색하고 제목과 목차를 연구했다. 아마존에서도 같은 키워드를 넣고 발행된 책들의 제목과 목차를 연구했다. 그랬더니 동양과는 다른 접근이 눈에 띄었다.


서양인들은 선이나 명상이 삶에 끼치는 효용에 관심이 많았다. 스트레스 감소, 통증 완화, 기억력 및 집중력 향상, 마음의 안정 등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바로 감사, gratitude라는 단어가 꽤 많이 보였다. 명상을 오래 하면 자기가 이미 갖고 있는 것들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맥락은 이랬다. 명상을 하게 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안정이 된다. 마음이 안정되면 자신이나 세상의 있는 그대로가 좀 더 명료하게 보인다. 그렇게 자기 객관화가 되고 세상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하면 자신이 많은 도움과 사랑으로 살고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인정하게 되고, 주어지는 사랑을 당연시하지 않고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이 가슴에 확 와닿았다. 감사함을 느끼는 건 실질적인 삶의 태도가 변화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밴쿠버에 가기 전까지 명상에 대해 논문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원불교에서는 무시선 무처선이라고 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선 명상을 하는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렇게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선은 이미 중국 당나라 시대 조사선에서 이미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이다. 조사선에서는 일용행사, 그러니까 물 긷고 나무하는 모든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바로 깨달음이 되고 명상이 된다. 그런 면에서 당연히 시간을 가리거나 처소에 구애받지 않는 선풍이 육조 혜능 이후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는 거다. 그러니 그걸 원불교 선의 특징이라며 박사학위 논문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선과 감사를 연결하는 서양인의 접근은 꽤 매력이 있었다. 어쩌면 서양인들은 합리적이기 때문에 동양에서 선이나 명상에 부여한 정통성이나 권위를 뛰어넘어 명상의 본질에 더 다가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선이나 명상은 실상을 알고, 보고, 경험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세상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의 모습으로 보고 관계하는 일인 거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면 우리나 세상은 독립된 개체나 개체들의 합이 아니다. 모두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서로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다. 단단하고 고정된 개별적 독립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호작용적 존재인 거다. 그런 면에서 너 없이는 나의 존재가 불가하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지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감사함이 우러난다. 존재의 실상에 대한 자각이 불러오는 당연한 감정인 거다. 그러니 서양인들이 명상을 잘하면 그 효과로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이 점에 영감을 받아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비록 초안이지만 도출해 낼 수 있는 결과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은 개인적으로는 전인적 인격완성을 이루게 하고 대사회적으로는 서로에게 유익을 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선, 명상을 잘하면 삶이 좋아져야 하는 것이다. 조용히 눈 감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깨워 원만하고 전인적인 인격을 갖춘 좋은 사람이 되고, 모든 관계에 감사함을 느끼며 그 감사한 마음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는 형태로 발휘되는 삶의 방식을 견지하게 하는 것이다.


훗날 알게 된 선 명상을 잘하는 수행자들이 실제 경험담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명상을 오래 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한 수행자들은 선 명상을 통해 마음이 고요해지고 명료해지면 몸과 마음에 가벼움을 느끼고 기쁨이 느껴진다고 한다. 동시에 만족감과 감사함이 안에서부터 차오른다고 한다. 그것이 존재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굳건하고 고정적 실체가 아니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힘으로 모든 변화가 계속되며 우리의 삶이 계속되는 것임을 알게 되면 감사하고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명상 수행을 잘 한 뛰어난 수행자들에게 들을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담인데 당시 서양인들이 선과 감사의 상관관계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통찰력 있는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오랫동안 미뤄왔던 논문을 쓸 수 있었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학위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사람들의 대우가 다르다. 지금 받는 철학박사로서의 대우는 그때, UBC에서 연구한 서양인들의 통찰력 덕분이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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