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새로운 제왕

by 연구소장

“오후 3시에, 대표이사님께서 긴급 임원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서 부실장님께서도 반드시 참석해 달라는 하명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지안은 인터폰을 끊고, 옷걸이에 걸려 있던 새하얀 재킷을 다시 걸쳐 입었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얼굴에는 방금 전 대중 앞에서 보여주었던 그 슬프고 연약한 기색은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오직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포식자의 서늘하고 오만한 안광만이 빛나고 있었다.


“박 대리, 오 과장.”


“네, 부실장님.”


“준비하세요. 부사장이라는 오물이 치워졌으니, 이제 그 피 묻은 왕관을 머리에 쓸 주인이 입장할 시간입니다.”


지안의 하이힐 소리가 경쾌하게 39층 집무실을 울렸다.


완벽한 마침표를 찍은 이단심문관. 그녀가 설계한 가장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지옥 위에서, 태성그룹의 새로운 제왕을 맞이하기 위한 붉은 카펫이 조용히 깔리고 있었다.


오후 3시. 본사 40층 대회의실.


부사장 라인의 핵심 임원들이 줄줄이 검찰 조사를 받으러 불려 나간 탓에, 거대한 원형 테이블의 절반이 흉물스럽게 비어 있었다. 남은 자들은 모두 40층 대표이사의 눈치만을 살피는 파벌이거나, 어느 쪽에도 줄을 서지 못해 바들바들 떠는 박쥐들뿐이었다.


상석에 앉은 늙은 대표이사는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서지안을 보며 아주 인자하고도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오, 태성그룹을 구한 우리의 잔다르크. 어서 오게.”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짙게 배어 있었다. 대표이사는 지안이 완벽한 언론 플레이로 부사장을 사냥하고 사내 여론을 진정시킨 것을 두고, 그녀가 자신을 위해 아주 훌륭하게 궂은일을 해치운 충직한 사냥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지안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배석자 자리에 우아하게 앉았다.


“자, 다들 모였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대표이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부사장의 구속으로 인한 경영 공백이 심각하네. 다행히 서 부실장의 기지로 주가 하락은 막았지만, 흔들리는 시장의 신뢰를 단숨에 회복하려면 파격적인 쇄신안이 필요해. 그래서 나는 병상에 계신 회장님의 재가를 얻어, 외부에서 명망 있는 글로벌 경영 전문가를 새로운 그룹 총괄 사장으로 영입할 계획이네. 내가 이사회 의장으로서 그를 직접 돕고 그룹을 재건할 생각이야.”


그의 선언에 임원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 인사 영입. 그것은 곧 대표이사가 자신의 입맛에 맞는 허수아비 바지사장을 앉혀놓고 태성그룹의 모든 실권을 완벽하게 사유화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대표이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지안을 쳐다보았다.


“물론 이번 사태의 일등 공신인 우리 서지안 부실장에게도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겠지. 서 부실장은 앞으로 신임 총괄 사장을 보좌하는 전략기획실장으로 승진하여, 사내의 잔존하는 부사장 라인의 비리 세력을 뿌리 뽑는 감찰 업무에 계속 매진해 주길 바라네.”


표면적으로는 승진이었지만, 실상은 토사구팽을 위한 목줄 채우기였다.


자신이 왕좌에 앉는 데 걸림돌이 되는 부사장을 치기 위해 지안의 칼을 빌렸을 뿐, 저 위험하고 피 묻은 백정에게 나라의 곳간 열쇠를 쥐여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당히 명예로운 직함을 주고 사내 정치판의 피를 묻히는 사냥개로 평생 부려 먹겠다는 교활한 계산이었다.


임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대표이사의 결정에 동조했다.


하지만.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서늘한 눈동자로 대표이사를 물끄러미 응시하며, 가늘고 하얀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 톡, 두드리고 있을 뿐이었다.


“대표님.”


고요한 회의실을 가르는 지안의 나긋한 목소리. 박수 소리가 뚝 멎었다.


“외부 인사 영입에 대해, 병상에 계신 회장님의 재가를 얻으셨다고 하셨습니까?”


대표이사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감히 일개 부실장이 자신의 말에 토를 다는 것이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렇네만. 내가 어제저녁 직접 보고를 올리고 동의를 구했지.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이상하네요.”


지안이 붉은 입술을 매혹적으로 끌어올리며, 품에서 묵직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중앙으로 미끄러뜨렸다.


“제가 오늘 아침, 회장님으로부터 직접 하달받은 ‘그룹 비상 경영 체제 명령서’와는 내용이 완전히 달라서 말입니다.”


“뭐… 뭐어?”


대표이사의 얼굴에서 여유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지안이 내민 서류 봉투에는 태성그룹 창업주, 즉 회장의 절대적인 인감과 함께 붉은색 밀랍 봉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서, 서 부실장. 자네가 어떻게 회장님을 직접 뵙고….”


“제가 말씀드렸을 텐데요, 대표님.”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이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대회의실의 적막을 찢었다.


“저는 누군가의 사냥개로 쓰이고 버려질 종자가 아니라고. 당신이 부사장을 물어 죽이라고 제 목줄을 풀어주었을 때, 저는 이미 부사장뿐만 아니라 당신이라는 늙은 여우의 목덜미까지 한 번에 씹어 삼킬 턱뼈를 다듬고 있었다는 것을요.”


시간은 사흘 전, 일요일 새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사장이 32층 집무실에 스스로를 감금하고 주가 조작과 비자금 조성이라는 끔찍한 파멸의 늪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고 있던 그 시각.


지안은 외부의 접근이 철저하게 통제된 회장의 VIP 병동을 홀로 찾았다. 병실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들과 수간호사들은 이미 지안의 특별정보통제팀이 제공한 막대한 현금과, 그들의 뒤를 캔 약점(협박)에 의해 완벽하게 매수된 상태였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늙은 제왕.


평생을 바쳐 일군 태성그룹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병상에서 지켜봐야만 하는 그 고독하고 잔혹한 호랑이 앞에, 서지안이 다가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 전략기획실 부실장 서지안입니다.”


회장의 탁한 눈동자가 지안을 향했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 형형했다.


지안은 부사장이 주말 동안 저지른 모든 횡령 장부와 주가 조작 증거들, 그리고 40층 대표이사가 뒤에서 부사장을 쳐내고 외부 인사를 들여 회사를 완전히 사유화하려 했던 음모의 녹취록을 병상 옆 테이블에 차례대로 올려놓았다.


“회장님의 유일한 혈육이신 부사장님은 회사를 사유화하려다 횡령을 저지른 미치광이로 전락했고, 회장님이 평생을 믿고 맡기셨던 40층의 대표이사는 그 틈을 타 태성그룹의 간판을 갈아치우고 스스로 왕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늙은 제왕의 심박기가 미세하게 요동쳤다. 깊은 빡침과 분노였다.


“회장님. 핏줄이라는 알량한 감정에 휘둘려 무능한 자식에게 회사를 뺏기는 것도, 평생 남의 밑에서 월급이나 받던 늙은 경영인에게 곳간 열쇠를 통째로 넘기는 것도, 태성그룹의 창업주이신 회장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지안은 회장의 귀에 바짝 다가가, 세상에서 가장 서늘하고도 유혹적인 악마의 계약을 제안했다.


“저에게 이 그룹의 완전한 통제권을 주십시오.”


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일개 30대 여성 임원이 그룹의 통제권을 달라는, 그 오만하고도 미친 발언. 하지만 지안의 눈빛에는 그 어떤 두려움도, 허세도 없었다. 오직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홀로 살아남은 최상위 포식자의 압도적인 자신감과 살기만이 존재했다.


“제가 내일 아침, 부사장을 가장 명분 있고 깨끗하게 도려내어 오너 일가의 리스크를 대중의 환호 속에서 완벽하게 소각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회장님의 눈을 속이고 반역을 도모한 저 늙은 대표이사 역시, 뼈도 추리지 못하게 찢어 발겨 드리죠.”


지안은 자신의 붉은 립스틱이 칠해진 입술을 매혹적으로 끌어올렸다.


“무능한 핏줄이나 교활한 늙은이 대신, 가장 완벽하게 벼려진 젊고 잔혹한 칼날에게 이 제국을 물려주십시오. 제가 태성그룹을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거대하고 압도적인 폭군으로 만들어 회장님의 영전에 바치겠습니다.”


생존과 번영만을 숭배하는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핏줄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존속 그 자체다.


회장은 지안의 눈에서 보았다. 과거 젊은 시절, 수많은 경쟁자들의 목을 베고 피를 뒤집어쓴 채 태성그룹을 일으켜 세웠던 자신의 그 짐승 같은 안광을.


자식보다 더 자신을 닮은 완벽한 괴물.


늙은 제왕은 호흡기 너머로 거친 숨을 내쉬며, 곁에 있던 만년필을 쥐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지안이 내민 ‘비상 경영 권한 위임장 및 총괄 사장 임명장’에 자신의 서명을 갈겨썼다.


다시 현재. 40층 대회의실.


대표이사는 지안이 던진 서류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며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현 대표이사의 직무를 즉각 정지하며, 경영 공백을 수습할 그룹 총괄 사장 자리에 서지안을 임명함. 태성그룹의 모든 재무, 인사, 감찰 권한을 서지안 총괄 사장에게 전면 위임함. - 태성그룹 회장]


“이… 이건 말도 안 돼. 회장님이, 그 깐깐한 양반이 너 같은 새파란 기집애한테 그룹 전체를 통째로 넘겼다고?!”


대표이사가 서류를 집어 던지며 악을 썼다.


“네년이 회장님을 협박해서 강제로 찍어낸 게 분명해! 이사진 여러분, 이건 무효입니다! 당장 보안팀을 불러서 이 미친년을 끌어내…!”


“보안팀은 오지 않을 겁니다, 전(前) 대표님.”


지안이 여유롭게 대표이사의 말을 자르며 대회의실 뒷문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문이 열리고, 그녀의 사냥개들인 오 과장과 박 대리, 그리고 덩치 큰 사내 보안 요원들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대표이사의 호출이 아닌, 지안의 수족으로서 이곳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지안은 대표이사의 책상 위로 또 다른 서류 하나를 툭 던졌다.


“방금 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당신은 내게 부사장을 치라고 지시했다고 믿었겠지만, 저는 그 과정에서 부사장뿐만 아니라… 당신이 하청업체들로부터 뒤로 챙긴 막대한 리베이트 장부와 차명 골프장 소유 내역까지 완벽하게 스캔해 두었다고.”


대표이사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지안은 빳빳하게 굳어버린 임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사님들. 선택하십시오. 횡령과 배임으로 내일 아침 검찰 포토라인에 설 저 늙은 패배자와 함께 침몰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회장님의 공식적인 재가를 받은 새로운 총괄 사장 밑에서 이전보다 더 거대하고 달콤한 권력을 누리시겠습니까.”


단 한 번의 피도 흘리지 않은 완벽한 쿠데타.


권력의 향방과 쥐고 있는 칼자루의 예리함을 직감한 이사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지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끌어내세요.”


지안의 서늘한 명령 한마디에, 특감팀 출신의 보안 요원들이 발악하는 늙은 대표이사의 양팔을 꺾어 대회의실 밖으로 짐짝처럼 질질 끌고 나갔다.


“서지안! 네년이 무사할 줄 알아! 넌 괴물이야! 네년도 결국 똑같이 당할 거라고!!”


멀어져 가는 늙은 여우의 단말마. 지안은 그 소음이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그 쾌감을 음미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떠, 텅 비어버린 대회의실의 가장 상석—방금 전까지 대표이사가 앉아 있던 그 거대한 가죽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지안이 우아하게 상석에 몸을 기대는 순간, 남아있던 모든 임원들이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외쳤다.


“총괄 사장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외부 영입 인사가 아닌, 평사원으로 입사해 가장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온 내부 출신 최초의 총괄 사장. 태성그룹 역사상 전무후무한 30대 여성 최고 경영자의 대관식이 가장 피비린내 나고도 적막한 회의실에서 완성되었다.


그날 밤 10시.


총괄 사장의 새로운 공간이 된, 본사 최상층의 가장 넓고 압도적인 펜트하우스 집무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발밑에 엎드려 있는 듯한 완벽한 조망. 집무실 한가운데에는 최고급 대리석으로 세공된 거대한 책상이 놓여 있었다.


지안은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자신을 이 자리까지 밀어 올린 7명의 사냥개들—과거 22층 특별감사팀에서부터 함께 피를 묻혀온 심복들을 펜트하우스로 호출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7명의 요원들은, 숨이 멎을 듯한 최고층 집무실의 위용과 여왕처럼 군림하는 지안의 모습에 압도되어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회사 구석에서 장부나 뒤적이던 자신들이, 그룹의 오너 일가와 최고 경영진을 모조리 도륙하고 이 제국의 심장부에 입성했다는 사실에 그들의 몸은 극도의 흥분으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편하게 앉으세요.”


지안이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송태섭, 백도훈, 최동욱, 그리고 부사장과 대표이사까지. 우리가 이 거대한 무균실의 바이러스들을 완벽하게 소각해 낸 건, 여러분의 그 맹목적이고 더러운 헌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사장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저희의 피와 살을 바치겠습니다!”


오 과장이 바닥에 엎어질 듯 허리를 굽히며 외쳤다.


지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미리 준비해 둔 검은색 가죽 서류 가방 7개를 그들 앞으로 하나씩 밀어주었다.


“충성에는 언제나 그 이상의 압도적인 현물이 따라야 하는 법이죠. 나는 내 사람들에게 인색하게 굴며 뒤통수나 치는 부사장 같은 쓰레기들과는 다릅니다. 열어보세요.”


박 대리가 가장 먼저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다.


찰칵.


가방 안에는 한도 무제한의 VVIP 법인 블랙카드, 강남 한복판의 최고급 펜트하우스 등기 권리증, 그리고 태성그룹의 핵심 계열사와 본부들을 총괄하는 ‘임원 임명장’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일개 사원과 대리, 과장급이었던 그들을 하루아침에 그룹의 꼭대기 층 임원으로 수직 상승시켜 버리는 파격적인 보상.


“이, 이게 다… 사장님, 저희가 감히 이런….”


“거두세요. 여러분은 이제 특감팀의 일개 실무진이 아닙니다. 내가 이 태성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 사내 곳곳에 꽂아 넣을 나의 가장 날카로운 7개의 송곳니입니다.”


지안은 샴페인 잔을 들고 천천히 테이블을 돌며, 7명의 요원들에게 그들이 왜 이 압도적인 권력을 쥘 자격이 있는지, 그 피 묻은 공로를 하나하나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칭찬을 가장한 완벽한 세뇌이자, 영원한 공범으로서의 결속 의식이었다.


첫 번째 송곳니, 정보통신 및 IT 보안 총괄 전무 - 박준영 대리.


“박 전무.”


대리에서 단숨에 전무로 파격 승진한 박준영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당신은 이 사냥의 완벽한 ‘눈과 귀’였습니다. 최동욱 본부장의 금고를 털기 위해 가짜 익명 메시지를 보내 사내를 불신의 지옥으로 만들었고, 부사장의 스마트폰을 감청해 그가 혼외자 망상에 빠져 미쳐가는 모든 순간을 데이터로 기록했죠. 부사장의 차명 계좌에 가짜 항공권과 송금 내역을 심어 그를 횡령 도주범으로 세팅한 당신의 해킹 실력은 예술이었습니다. 이제 그룹의 모든 IT망과 서버, 임직원들의 은밀한 통신 기록은 박 전무, 당신의 손아귀에 있습니다. 사내에 돌아다니는 쥐새끼 한 마리의 정보도 내 허락 없이 새어 나가지 않게 통제하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사장님! 제 영혼을 갈아 서버를 지키겠습니다!”


두 번째 송곳니, 재무 및 감사본부 부본부장 - 오창석 과장.


지안의 시선이 행동대장 오 과장에게 머물렀다.


“오 부본부장. 당신은 나의 완벽한 ‘행동대장’이었습니다. 35층 인사본부를 들이치고 최동욱이 갇힌 집무실에 자물쇠를 채워 그를 미치광이로 붕괴시킨 물리적인 압박감. 그리고 경찰 출동 시, 나를 보호하며 그를 살인 미수범으로 몰아간 그 뻔뻔한 현장 연기까지. 현장에서 피를 묻히고 악역을 자처한 당신이 없었다면 무대 세팅은 불가능했습니다. 이제 그룹의 모든 현금 흐름과 감사 권한을 쥐고, 내 뜻에 반하는 놈들의 목줄을 언제든 합법적으로 끊어버릴 수 있는 단두대를 관리하세요.”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하겠습니다! 제 목숨은 사장님의 것입니다!”


세 번째 송곳니, 인사전략실 총괄 상무 - 김태희 대리.


지안은 유일한 여성 팀원이었던 김 대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김 상무. 당신은 아주 훌륭한 ‘독거미’였습니다. 최동욱의 라인이었던 인사팀 여직원들 사이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그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배신하도록 감정적인 이간질을 주도했죠. 사내 화장실과 탕비실에서 가장 파괴적인 찌라시를 자연스럽게 퍼뜨려 군중 심리를 조작한 당신의 사회적 지능(Social Engineering)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이제 인사전략실을 맡아, 내게 충성하는 자들에게는 끝없는 보상을, 반항하는 자들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좌천을 내리며 사내 파벌을 내 입맛대로 세탁하세요.”


“사장님의 뜻대로, 태성그룹의 모든 인사를 무균 상태로 재편하겠습니다.”


네 번째 송곳니, 법무감찰실장 - 이준호 차장.


“이 실장. 당신은 든든한 ‘방패’였습니다. 부사장을 옭아맬 때, 그가 내린 지시들이 어떻게 자본시장법 위반과 특경법상 배임으로 엮일 수 있는지 완벽한 법리적 함정을 설계했죠. 우리가 저지른 불법 도청과 해킹 증거를 모두 합법적인 내부 감찰 자료로 둔갑시켜 검찰에 넘긴 정교한 법률 지식. 이제 그룹의 모든 법적 분쟁과 대관 업무를 총괄하며, 그 어떤 사법 기관도 내 왕좌를 건드리지 못하게 철옹성을 치세요.”


“법은 사장님을 위해 존재하도록 만들겠습니다.”


다섯 번째 송곳니, 사내 홍보 및 미디어 통제 본부장 - 최진혁 사원.


“막내였던 최 본부장. 당신은 사내 블라인드와 주식 커뮤니티를 쥐락펴락한 ‘선동의 천재’였습니다. 매크로 계정 수백 개를 돌려 부사장을 주가 조작범으로 몰아가고 폭동 직전의 에너지를 만들어냈죠. 내가 눈물을 흘릴 때 기자들에게 촌지를 먹이며 나를 ‘잔다르크’로 포장한 기사들을 쏟아내게 만든 그 언론 통제력. 앞으로 태성그룹의 긍정적인 이미지는 내가 독식하고, 부정적인 리스크는 철저히 은폐하는 나의 선전 장관이 되세요.”


“대중의 눈과 귀를 사장님의 입술에 맞추겠습니다.”


여섯 번째 송곳니, 전략투자 및 비자금 관리실장 - 윤기상 과장.


“윤 실장. 부사장이 미쳐 날뛰며 해외 페이퍼 컴퍼니의 비자금을 융통할 때, 당신은 그 검은돈의 흐름을 단 1원도 빠짐없이 역추적했습니다. 심지어 부사장의 비자금 중 일부를 검찰에 넘기기 전 교묘하게 빼돌려 우리가 오늘 나누어 가질 이 거대한 성과급의 재원으로 세탁해 낸 당신의 악마 같은 회계 조작 능력. 앞으로 태성그룹의 공식적인 자금 외에, 내가 사용할 천문학적인 그림자 자본을 불리고 관리하는 금고지기 역할을 맡으세요.”


“사장님의 금고가 마르지 않도록, 세상의 모든 검은돈을 세탁해 바치겠습니다.”


일곱 번째 송곳니, 그룹 총괄 물리보안실장 - 정민재 대리.


“정 실장. 당신은 나의 완벽한 ‘방패이자 창’이었습니다. 35층을 물리적으로 봉쇄하여 최동욱을 감금하고, 부사장이 집무실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철저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죠. 경찰이 출동했을 때 완벽한 타이밍에 문을 열어 최동욱이 내게 흉기를 휘두르는 장면을 목격하게 만든 치밀한 현장 통제까지. 이제 그룹 본사와 모든 계열사의 물리적 보안, 그리고 내 개인의 안위를 책임지는 완벽한 사병(私兵) 집단을 구축하세요.”


“제 목숨을 바쳐 사장님의 그림자조차 다치지 않게 지키겠습니다!”


지안은 7명의 충견들을 향해 나긋하면서도 소름 돋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단순히 직함을 나눠주는 행위가 아니었다. 태성그룹이라는 거대한 유기체의 뇌신경(IT), 혈관(재무), 근육(인사/보안), 그리고 입(홍보/법무)을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겠다는 지독한 선언이었다.


“기억하세요.”


지안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리며 낮게 속삭였다.


“여러분이 오늘 손에 쥔 이 막대한 황금과 권력은, 오직 나를 위해 짖고 나를 위해 물어뜯을 때만 유지되는 특권입니다. 만에 하나, 여러분 중 누군가 권력에 취해 옛 부사장처럼 오만해지거나 내 통제를 벗어나려 한다면….”


지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서늘한 한마디에, 7명의 임원들은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내가 여러분을 도마 위에 올리는 과정은, 최동욱이나 부사장을 찢어 발겼던 것보다 백 배는 더 고통스럽고 끔찍할 겁니다. 여러분의 비리와 조작 증거는 이미 내 하드디스크에 완벽한 인질로 잡혀 있으니까요.”


채찍과 당근의 완벽한 조화.


도덕성을 거세하고 엄청난 부를 하사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의 약점을 손에 쥐고 언제든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공포를 주입하는 지배의 정석.


7명의 맹견들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샴페인 잔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며 맹세했다.


“저희의 피와 살, 그리고 영혼까지 사장님의 것입니다!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쨍, 하고 크리스탈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펜트하우스를 가득 채웠다. 돈과 공포로 완벽하게 빚어진, 태성그룹의 새로운 지배 체제가 그 견고한 닻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심복들이 모두 물러가고, 텅 빈 펜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서지안.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통유리창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발아래로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개미처럼 바쁘게 오가는 서울의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위스키가 담긴 잔이 들려 있었다.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과거, 그녀는 이 빌딩의 가장 낮은 곳에서 늙고 천박한 수컷 임원들의 끈적한 시선과 성희롱을 웃음으로 견뎌내야 했던 평범한 여직원이었다.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도 ‘얼굴 반반한 여자애가 독하네’라는 비아냥으로 돌아오고, 권력자들의 사소한 심기 하나에 목숨이 잘려 나갈까 두려워 밤잠을 설치던 시절.


“역겨운 새끼들.”


지안은 잔을 가볍게 흔들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자신을 애완견 취급하며 허벅지를 주무르던 부사장은 지금 차가운 구치소 독방에서 정신 분열증 약을 먹으며 밤마다 벽에 머리를 찧고 있었다. 사내의 모든 인사를 쥐고 흔들며 접대를 즐기던 최동욱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가족에게마저 버림받았다. 자신을 이용해 회사를 훔치려던 대표이사는 쫓겨나 검찰 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녀를 벌레 보듯 짓밟으려 했던 모든 수컷 포식자들은, 역으로 그녀가 짜놓은 거대한 심리전의 그물에 걸려 스스로 도끼를 들고 제 발등을 찍으며 비참하게 도륙당했다.


지안은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창백하고도 눈부신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슬픔과 억울함을 연기하던 그 연약한 가면은 이미 완벽하게 벗겨져 나가고, 오직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최상위 포식자의 잔혹하고 매혹적인 안광만이 빛나고 있었다.


태성그룹이라는 거대한 제국은 이제 완벽하게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사내의 모든 임직원들은 그녀를 회사를 구한 성역이자 두려운 지배자로 추앙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냥개로 길러져 포식자로 진화한 괴물의 본능은 결코 이 고요한 평화에 만족하지 못한다.


무균실 안의 모든 바이러스를 소각하고 나면, 지배자는 필연적으로 성벽 밖의 새로운 사냥터를 갈구하게 마련이다. 사냥감이 뿜어내는 공포의 냄새와, 그들이 무너져 내릴 때 터져 나오는 파멸의 굉음. 그것은 지안에게 있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유일한 마약이었다.


지안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어, 오늘 오후에 은밀하게 수집된 새로운 보고서를 열었다.


화면에는 대한민국 정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대 여당의 차기 대권 주자, 그리고 그와 결탁하여 태성그룹의 이권을 빼앗으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경쟁 재벌 그룹 회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우물 안의 늙은 쥐새끼들 사냥은 끝났으니.”


지안의 붉은 입술이, 또 다른 거대한 사냥감을 물색하는 뱀처럼 치명적이고 서늘한 호선을 그렸다.


“이제, 진짜 거대한 짐승들의 목줄을 끊어보러 갈까.”


그녀가 위스키를 단숨에 털어 넣는 순간, 펜트하우스를 밝히던 메인 조명이 스르륵 꺼지며 거대한 집무실이 짙은 어둠 속으로 잠겼다. 오직 창밖에서 스며드는 붉은 도시의 불빛만이 지안의 실루엣을 기괴하고도 아름답게 비추고 있었다.


가장 우아하고 잔혹한 이단심문관의 사냥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먹이사슬의 정점에 선 새로운 제왕은, 이제 더 넓고 핏빛으로 물든 세상을 향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끔찍한 사냥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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