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할머니 집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었다.
집 근처 오락실 가기 직전의 작은 책방.
나무 선반 위에 빼곡히 자리 잡은 책들,
비닐 코팅된 표지, 책 구매 시 주는 사은품까지 생생하다.
하지만 나는 책을 사러 간 게 아니라,
소년챔프와 아이큐점프 같은 주간 만화잡지를 사기 위해 들렀다.
어쩌면 그 기억이 좋아서 할머니 집에 가는 일이 더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동네 책방은 단순한 책 판매점이 아니었다.
할머니 집 근처 책방은 사촌이 운영하는 곳이었고,
명절이면 세배도 드리고 안부를 묻는 곳이기도 했다.
각각의 동네 책방에는 나름의 테마와 개성이 있었다.
어떤 곳은 교과서나 참고서를, 어떤 곳은 만화책을 중심으로 판매했다.
책을 구매하는 것뿐 아니라, 책방의 분위기와 주인의 추천도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대형 서점이 등장하면서 동네 책방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었다.
정리된 서가, 넓은 공간, 주변의 편의시설까지 갖춘 대형 서점이
더욱 매력적인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했던 작은 책방들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대학생이 되자, 내게 더 친숙한 곳은 동네 책방이 아니라
교보문고, 영풍문고, 반디앤루니스 같은 대형 서점이 되었다.
기존의 책방과 달리 대형 서점은
넓고 개방적인 공간, 정돈된 서가, 자유로운 시간이 가능하였다.
책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경험이 되었고,
주변에는 카페, 도넛 가게, 베이커리 같은 편의시설이 함께했다.
이제 서점은 단순히 책을 구매하는 곳이 아니라
독서와 휴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게다가 대형 서점은 책뿐만 아니라
문구, 음반, 디자인 소품, 라이프스타일 제품까지 판매하며
보다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또한, 저자 강연, 북토크, 전시회 등 문화 행사를 통해
책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했다.
이제 서점은 책을 소비하는 공간이 아니라, 책과 함께 머무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친구들과의 약속 장소, 시간을 보내는 곳으로 활용되며,
책을 사지 않더라도 찾고 싶은 복합문화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온라인 서점이 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대형 서점도 새로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로 온라인 서점이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나 역시 점점 대형 서점을 찾기보다
할인율이 높고 배송이 빠른 알라딘, YES24 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온라인 서점의 장점은 분명했다.
첫째, 원하는 책을 검색하고 비교한 뒤, 주문하면 편리하게 집으로 배송된다.
둘째, 수많은 독자 리뷰와 추천 알고리즘이 책 선택을 도와준다.
셋째, 전자책과 오디오북이 보편화되면서 종이책을 직접 소유할 필요성이 줄어들었다.
온라인 서점의 성장은
대형 서점들이 기존의 운영 방식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대형 서점들은 공간을 확장하고, 문화와 체험을 강조하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책을 단순히 구매하는 곳이 아닌,
머물고 싶은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생존 전략이 되었다.
서점 내 독서 공간과 카페를 확장하고, 디지털 체험 공간과 협업 브랜드를 유치하는 등
‘책을 둘러싼 경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서점이 가진 ‘공간’의 의미는 점점 흐려지고 있다.
동네 책방이 사라지고, 대형 서점은 문화 공간으로 변화하고,
온라인 서점은 독서의 경계를 확장했다.
책과 공간의 관계는 점차 달라지고 있지만
책을 찾거나,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책을 소비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책이 가지는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서점은 더욱 스마트해지고,
더 개성 있고, 더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진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