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감각을 회복하는 순간

무뎌진 ‘사랑의 감각’이 일상의 작은 순간들 속에서 다시 깨어나는 이야기

by 스틸노트


“채채 엄마가 좋아.”
“엄마 꼭 안아주꺼야.”
“채채야, 엄마가 왜 좋아?”
“엄마 사랑해서 좋아. 엄마 많이 사랑해요.”


하루 종일 엄마 곁을 맴도는 아이. 오늘따라 유독 손을 꼭 잡고 졸졸 따라다니며, 밥을 먹을 때도 주방놀이를 할 때도 엄마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 잠시라도 다른 방으로 이동하면 금세 쫓아와 옆자리를 차지하는 아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낮잠을 거부하는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다 진이 빠져, 서재로 돌아와 자괴감에 시달리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커피 한 잔을 건네며, 요즘 부쩍 쉽게 지치는 이유와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무표정한 얼굴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밤잠을 재우는데, 새벽이 되자 아이의 기침이 심해졌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는 아이를 바라보며, 애잔한 마음에 하염없이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아프지 말게 해 달라 ‘고 조용히 기도했다. 그때 아이는 자꾸만 눈을 떠 엄마를 바라보았다. 같은 침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좋았던 걸까. 조용한 새벽, 방 안의 공기처럼 서로를 향한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다음날, 아이는 하루 종일 엄마를 쫓아다니며 사랑 고백을 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 한마디에 감동이 벅차오르며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이 말했다.

”어젯밤 여보가 밤새 돌봐준 걸 아이가 아나 봐.“


순간, 아이와 감정싸움을 했던 일이 미안해졌다. 소진된 마음을 다시 사랑으로 채워주는 아이가 고마워 나는 아이를 더 꼭 안아주었다. 마침 주일예배 설교 주제도 ’사랑의 성숙‘이었다.


점심 무렵, 엄마에게서 택배가 도착했다. 과일, 밤, 견과류, 참치, 참기름, 영양제, 레몬즙, 생식까지 박스 한가득 빼곡히 담겨 있었다. 명절에 시댁에 들렀다 곧바로 먼 타지로 돌아가는 딸에게 음식을 챙겨주지 못한 마음이 남으셨던 걸까. 정성으로 채워진 엄마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건 분명 엄마의 사랑이었다.


지친 마음 한가운데에서 아이가, 남편이, 그리고 엄마가 보내온 사랑이 나를 단숨에 일으켜 세웠다.


아이의 직접적인 사랑 표현에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복했고, 점심을 차려주고 아이를 재워주는 남편의 행동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엄마가 보내준 택배, 이따금씩 고기와 과일을 챙겨 보내주는 아빠의 마음까지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


누군가의 손길을 받는 일, 도움을 청하는 일, 위로받는 일. 그런 일들이 부끄럽거나 약해 보인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쩌면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아이처럼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주기 위해 애쓰다 보면 정작 내 안의 사랑은 금세 모자라진다. 그러다 뜻밖의 사랑을 받는 순간, 그 빈자리가 한순간에 채워진다.



며칠 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 놓고 남편과 점심데이트를 했다. 동네에서 소문난 돈가스집에서 밥을 먹다가, 남편이 불쑥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맛있는 걸 먹을 때나 좋은 곳에 갈 때마다 여보랑 채채가 생각나. 사랑이란 걸 정의한다면, 그게 사랑인 것 같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나도 그래. 채채 이유식할 때 옥수수를 한 알 한 알 껍질을 까서 먹여준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채채를 진짜 많이 사랑한다는 걸 느꼈어.”


남편과 아이를 생각하며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손수 정성 들여 음식을 만들고, 돌잔치 때 가족들에게 보여줄 5분짜리 성장동영상 하나에도 잠을 줄여가며 몰두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만두를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생전 처음 만두소를 만들고 모양을 내어 빚고 찌던 순간도, 이렇게 사진과 영상을 기록하며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사랑은 결국 ‘하고 싶은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손이 많이 가고, 수고스럽더라도 기꺼이 해주고 싶은 마음.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배우고 변화하고 성장하고 싶은 마음. 상대의 기쁨이 내 일처럼 기쁜 마음. 내겐 그게 사랑이다.


어느 날 문득 마음이 비어 있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사랑의 감각이 무뎌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랑은 이미 다양한 형태로 오가고 있었는데,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럴 땐 주는 사랑을 잠시 멈추고, 받는 사랑을 온전히 느껴야 한다. 그렇게 사랑이 다시 채워지면, 우리는 또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사랑과 감사는 마음속에만 두면 완성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닿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오늘도 그 사랑과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 아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품에 안는다. 그렇게 나를 향해 주어진 사랑들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받은 만큼의 벅찬 사랑을 다시 누군가에게 건네주리라 다짐한다.


그래서 요즘은 하루의 끝에 감사한 일들을 적는다. “아이의 포옹”, “남편의 커피 한 잔”, “엄마의 전화 한 통”. 그렇게 기록하다 보면, 사랑은 멀리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삶은 여전히 고단하지만, 사랑이 채워진 하루는 언제나 조금 더 견딜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