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동네 할아버지들은 대개 멋진 수염을 기르고 계셨다.
마음씨 좋은 우리 할아버지도 하얀 수염을 가지셨다.
방학만 되면 사랑방엔 늘 아이들로 들끓었는데, 무엄하게도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지며 놀기도 했다.
사람 좋고 인심 넉넉한 당신은 너털웃음으로 기꺼이 허락하시곤 했다.
“이놈들아, 살살 만져라. 아프다. 허허.”
라고 하실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매일 아침 가위로 수염을 다듬으셨다.
턱수염만 남겨두고 모두 공들여 자르셨다.
아침 햇살에 비친 할아버지의 하얀 턱수염이 그렇게 근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당신의 무릎에 앉아 고사리손으로 만져보노라면,
까끌까끌한 촉감에 세상 걱정이 다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할머니나 어머니가 그 장면을 보시기라도 하면 버릇없다고 혼을 내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조금도 노여워하시지 않으셨다.
나도 어른이 되면 할아버지처럼 멋지게 수염을 길러보리라.
마음속 깊이 남몰래 작은 로망을 간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멋진 수염을 기르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학생이라서 못 기르고,
셀러리맨 40년이라 못 기르고,
옛날과 달리 수염 기르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창피한 나머지 못 기르고……
이런저런 이유로 예순이 훨씬 넘도록 어린 시절의 로망은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가끔,
긴 연휴나 여름휴가 때, 최장 일주일 정도 수염을 깎지 않고 내버려 둔 적은 있다.
그러나 상상했던 만큼 쉽지 않았다.
뭔가 찝찝하고 자꾸 손이 가고, 정돈되지 않는 기분이다.
자주 세수를 해봐도 개운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안 가서 ‘에이~’ 하며 깎게 된다.
수염을 기르고 관리하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지난주부터 여러 날 턱수염을 자르지 않고 내버려뒀다.
한 5mm 정도 자란 것 같다.
콧수염이나 귀밑머리는 깨끗하게 자르고, 오직 턱수염만 남겼다.
콧수염은 도저히 안 되겠다. 너무나 찝찝하다.
5mm 턱수염도 노상 만져서 턱이 얼얼할 지경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지낼지 솔직히 장담할 수는 없다.
내일 아침 홀라당 깎아 버릴지도 몰라.
딸과 아내의 반대가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