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14 ( 금요일)
20일 프랑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라면? 하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세잔의 아뜰리에 (Atelier de Cezanne)'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번 여행 중 모네의 지베르니 아뜰리에, 르느와르의 아뜰리에, 고흐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아를, 그리고 크고 작은 미술관을 보았지만 가장 혹독한 쓸쓸함과 외로움으로 다가온 세잔의 아뜰리에는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틀에 박힌 모든 가치를 부정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시작한 1896년부터 1906년 10월, 쓰러지는 순간까지, 외로운 구도자의 일상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가 죽고 15년 동안 아뜰리에가 방치되어 있었고 덕분에 그가 사용했던 도구들과 책상, 꽃병, 의자, 그릇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그림물감이 묻은 옷, 그가 사용한 가구, 그의 편지...... 아뜰리에 안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창문으로 내리는 빛의 한가운데, 세잔과 마주하는 느낌이다.
딸의 사진 중에서/ 세잔의 아뜰리에 (세잔의 낡은 가방과 모자, 창으로 들어오는 빛) 세잔의 아뜰리에 (세잔이 사용했던 그림 도구 와 아뜰리에의 큰 창)
세잔의 아뜰리에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안내원인지 감시원인지 아주머니가 시간제한을 두고 우리를 내쫓았다. 밖으로 나와 세잔이 생 빅트아르 산을 그렸다는 언덕에 올라보기로 했다.('Field of the Painters'를 구글 지도에 입력하고 아뜰리에에서 걸어갈 수 있으나 입구를 찾기가 어렵다.)
세잔이 걸었던 길을 걸었다. 조용하고 한적한 언덕에 오르니 미술사를 바꾼 세잔의 그림 '생 빅트아르 산'의 실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의 어리석은 눈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저 평범한 산의 모습일 뿐이지만.....
Field of the Painters 에서 보는 생 빅투아르 산
언덕을 내려와 '샤토 라 코스테 Chateau La Coste'로 가기 전에 다시 어제의 구시가지에 들러 프랑스에서 가장 맛있다는 마들렌 가게를 찾아갔다.
'Madeleines De Christophe'
다시는 구시가지의 좁은 골목길 탐험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들렌을 먹기 위해서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오렌지와 레몬 마들렌은 고소하고 달콤하며 완벽했다. 그 마들렌이 없었다면 다음 여정인 샤토 라 코스테에서 우리는 포도밭에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샤또 라 코스테 (Chateau la Coste)'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마지막까지 고민했었다. 이 곳을 가야 하는가. 아비뇽이나 '고흐의 빛의 채석장'을 가야 하는가. 머리를 쥐어짜다가 예술작품이 넘치게 숨어있다는, 아일랜드 출신 백만장자가 만든 프랑스 대표 와이너리에 가보자고. 안도 타다오가 설계했다는 건물과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싶었다.
마들렌 가게에서부터 자동차로 24분, 좁은 시골길이 끝나고 거대한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로 안도 타다오의 상징, 노출 콘크리트 커다란 문이 나타나자 나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입구부터 안도 타다오의 작품( 입구 문이 작품 1번)이다.
주차장으로 들어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쪽 벽면은 노출 콘크리트, 또 다른 벽은 유리로 되어있는 통로가 나오고 그 계단을 따라 올라가 고개를 돌리면 샤토 라 코스테의 아트센터이다(작품 2번). 아트센터 옆 낮고 잔잔한 물 위에 루이즈 브르주아의 거미 조각상(작품 3번)이 바람을 맞고 있다. 아트센터에 들어가니 영어를 매우 잘하는 친절한 안내원과 센터의 터줏대감 고양이가 우리를 반긴다.
( 작품 3. 루이즈 브르주아 Louise Bourgeois 의 거미 'Maman' )안내원은 커다란 지도에 친절하게 화살표를 그려주며 200 헥타르 와이너리와 산속에 있는 34개의 작품( 1,2,3, 은 이미 알고 있다.)의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주고 웃으며, 모두 돌아보려면 2시간 쯤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배가 고팠지만, 제대로 아침을 먹지도 못하고 오전에 생 빅투와르 산을 보기 위해 언덕을 올랐었다.... 2시간 이라면 빨리 돌아보고 돌아와 멋진 아트센터에서 밥을 제대로 먹으리라 하는 마음에서 물 2병과 액상프로방스의 마들렌을 챙기고 일본 작가 히로시 스기모토의 작품 4번을 찾으러 아트센터를 나섰다.
결론을 말하자면 200 헥타르의 와이너리 곳곳에 숨겨진 작품 34개를 모두 찾아보고 지도에 X 표시가 끝나기까지 3시간 30분이 걸렸으며. 산 위에서 안도 타다오의 또 다른 작품, 예배당( La Chapelle 작품 21)을 찾다가 딸에게 이제 그만 하자고 졸랐다. 포기를 모르는 나의 야속한 딸은 지도에 X 표시를 하며 나를 달래고 끌고 나갔다. 34개의 작품 중에 우리나라 작가 이우환의 작품 'House of Air' (작품 15번)이 있다. 문제는 이 작품, House를 찾으러 와이너리를 헤매었지만 시간은 지나고 멋진 와이너리는 그늘도 없고, 더위와 배고픔에 쓰러질 것 같았다. 아트센터에서 가장 먼 곳, 와이너리 끝에서 작품 15를 찾아내고 박수를 쳤는데 멋진 작품의 문이 닫혀 있어서 결국 집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다.
(작품 15. 이우환 Lee Ufan 'House of air')
와이너리 작품 순례를 마친 후 아트센터(작품 1번)로 돌아와 루이즈 부르주아의 거미(작품 3번)를 마주하고 아트센터 안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으려 하는데 점심시간은 끝났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밖으로 나와 칼더 의 'Small Crinkly'(작품 5번)가 바람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야외 테라스에서 간단히 치즈와 와인을 주문했다.
샤토 라 코스테의 야외 테라스 식당 'La Terrasse' .... 뒷편에 칼더 Calder의 작품 5번이 보인다.완두콩과 민트의 차가운 수프 (Cold bean and mint soup), 바게트 빵, 포도, 치즈, 와인이 오늘의 최고의 한 끼였다. 민트의 향이 맛을 더해주는 완두콩 수프는 다른 어떤 요리보다 멋지고 훌륭했다. 칼더의 작품 아래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어도 좋았다.
샤토 라 코스테에서 고흐의 아를(Arles)까지는 1시간 10분. 시골길을 벗어나 A54 도로에서 아를(Arles) 표지판이 보인다. 오늘의 숙소는 고흐의 '밤의 테라스 카페'와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인 론강을 걸어서 갈 수 있는 아를의 구시가지에 있는 작은 호텔이다. 이미 액상 프로방스의 좁은 골목길에서 충분히 예행연습을 했으나, 아를의 구시가지 역시 공용주차장에는 이미 자리가 없고 호텔 근처를 몇 바퀴 돌고 돌다가 결국 아를 기차역에 차를 세웠다 (구시가지 안의 호텔에는 주차장이 없다). 덕분에 짐을 끌고 고흐의 론강을 따라 20분을 걸어서 드디어 숙소에 들어섰다. 물 좀 마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숙소 주인아주머니는 물 한 병을 건네며 1유로를 달라고 했다. 방스의 마음 좋은 아주머니와 강아지가 떠올랐다.
와이너리의 순례에 몸과 마음을 빼앗겨 저녁을 먹으러 나갈 기운도 없었지만 어둠이 내리자 고흐의 '밤의 테라스 카페'에 가고 싶었다.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 광장 한 편에 너무나 익숙한 그 노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림처럼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과 가스등을 떠올렸다. 너무 슬픈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