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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에 나는 떠났다. (4월 제주 열여섯째 날)

2022년 4월 16일

by 은동 누나

오름에도 문이 있다. 문을 열어본다.


지난주에 놀러왔던 친구가 오름 책을 선물했다. 오름오름 트페킹 맵! 어젯밤, 열심히 공부했고 내가 오르지 못한 오름이 당연히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과 빨간 볼펜으로 오름의 이름과 다녀온 날을 확인했다. 그리고 오르고 싶은 오름을 찾았다. 제주는 오름의 나라다.


영주산으로 출발했다. 영주산은 오름이지만 산이라 불린다. 제주에서는 신성시 모실 때 산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고 한다. '신선이 살았던 산'이라니 당연히 확인해보아야 한다. 조용한 시골마을 길을 지나 도착한 영주산 입구는 사람들이 북적인다. 저마다 비닐봉지를 들고 있다. 지금 제주의 들판은 웨딩사진을 남기려는 젊은 커플과 고사리를 향한 집념의 아주머니들이 있다.


영주산 입구에 찾아주어서 감사하다는 방송이 계속 나온다. 경사가 완만한 계단을 올라 정상으로 가는 길이 아닌 오른쪽 둘레길을 선택했다. 완만한 둘레길을 따라 걸어간다. 병아리꽃나무, 복수초, 제비꽃이 가득하다. 멀리 파란 저수지도 보인다. 아주머니들이 고사리를 따느라 바쁘다. 나도 고사리를 찾아보았으나 나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풀이다. 아주머니들의 손목 스냅이 현란하다. 검은 비닐이 가득하다.


(영주산 둘레길)

끝없이 펼쳐질 듯한 길을 걷다 갑자기 이 길의 끝을 알리는 문이 나타난다. 그리고 좁은 문을 통과하니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오름은 살아있다. 이제 영주산의 뒤로 들어간다. 길은 조금씩 거칠어지고 조용하다. 길은 삼나무 편백숲으로 이어진다.


(영주산 둘레길의 문) ( 삼나무 길)


빽빽한 삼나무 길로 들어서자 서늘하다. 숲의 기세에 놀라울 뿐이다. 신선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느낌이다. 높은 나무 끝에 햇빛이 걸려있다. 바람과 나무의 향기에 취해 길을 걸었다.


신비로운 영주산을 떠나 샌드위치로 점심을 먹고 쇠소깍 근처에 차를 주차했다. 작년 9월 쇠소깍에서 제주 칼호텔까지 자전거로 달렸던 길을 다시 달려보고 싶었다. 환상 자전거길을 달린다. 보목포구를 지나고 14km의 짧은 길이었지만 바다를 마주하고 달리는 길에는 걷는 사람들도 활기차다.

(제주 환상 자전거길 쇠소깍)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다시 오름 책을 꺼내 들었다. 동부권 오름을 살피다 이름도 예쁜 물영아리오름이 눈에 들어왔다. 오후의 햇살은 아직 한창이다. 제주의 흔치 않은 습지 오름이며 물의 수호신이 산다는 오름이 있는 마을 수망리로 차를 돌렸다.


물영아리 오름 입구의 넓은 들판에 소떼가 집으로 돌아가는 듯 일렬로 걷는다. 바람이 분다. 숲의 입구에서 오후의 햇살을 살피며 가장 빠른 계단길을 선택했다. 빽빽한 삼나무 사이로 끝없는 계단을 오르고 오른다. 오전에 영주산을 오르고 자전거를 타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니 다리가 풀렸다. 고개를 들어도 삼나무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곳에도 신선이 사는가 보다. 세 번의 쉼터를 지나고 하늘이 열렸다. 길을 돌아 습지가 보인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 젊은이에게 마르지 않을 큰 샘을 선사한 백발노인의 이야기가 전해는 연못을 확인하고 계단길이 아닌 둘레길로 내려왔다.

(물영아리 입구)


(물영아리 오름 습지)

둘레길도 쉽지 않았다. 산뽕나무, 서어나무, 덜꿩나무, 사스레피나무, 때죽나무, 나무 이름표을 확인하며 걷는다. 저녁 햇살을 머금은 초록의 숲길을 돌고 돌아 내려온 들판에 고라니가 세 마리 풀을 뜯고 있다. 그중 한 마리가 우리와 눈이 마주친 듯, 몸을 낮춘다. 어제 백약이오름에서 찾은 고라니가 여기에 있다.



고라니에게 인사를 전하고 이제는 벚꽃도 유채꽃도 보이지 않는 녹산로를 지나 다시 성산으로 그리고 바다로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4.9km의 영주산 둘레길도 4.93km의 물영아리 둘레길도 길을 걷다보면 끝없는 문이 보인다. 문을 열면 다른 길이 보이고 그 길은 또 다른 문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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