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11월에는 단풍나무 숲으로
나무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것을
‘꽃’이라 한다면
봄이면 연둣빛으로 돋아나는 새잎도
가을에 고운 빛으로 물드는 단풍도
‘꽃’이라 하겠다.
연두는 남쪽에서부터 북상하고
빨강은 북쪽에서부터 남하한다.
봄까지 기다리기 힘들어
해마다 2월이면
연두를 마중하러
통영이나 남해 같은 남쪽으로 여행을 떠난다.
보리순이 돋아나
초록의 기운이 어린 들판을 보며
‘그래... 봄이 이렇게 오고 있어...’
안도하게 된다.
가을에는 단풍을 마중하러
설악산으로 가고 싶지만
먼 거리와 인파를 뚫고 갈 자신이 없어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한다.
교직에 있던 시절,
아이들 수학여행으로
가을의 설악산을 자주 찾았던 기억을 대신 꺼내 보며 마음을 달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단풍은 내장산이다.
내장산에 가 보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내장산 단풍~ 내장산 단풍~” 하는지
단번에 알게 된다.
작년 가을, 10월부터 11월까지
유럽 19개 나라를 여행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어디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예쁜 단풍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빨강.
빨강이 없었다!
은행나무의 노란빛을 좋아하지만
모든 단풍이 다 노랑이다 보니 너무 밋밋했다.
빨강은
엑센트이자
단풍계의 화룡점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단풍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우리나라에서 떠나가서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장산은 거리가 있어서
여러 번 갈 수 없으니 단풍 날짜를 잘 맞춰가야 한다.
개화 시기가 그렇듯
단풍 또한
미묘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데
이제 지구 온난화 때문에
꽃은 점점 빨리 피고, 단풍은 점점 늦어지기까지 하니
날짜를 예측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해마다 산림청에서 단풍 예측지도를 발표하는데
올해 내장산 단풍의 절정 시기는
11월 6일이라고 예측했다.
산림청의 예측이 맞는 걸 본 적이 없다.
왜 그런지
항상 정확하게! 실제보다 앞서 간다.
그니까 이 지도를 보면서는
내장산 단풍은 11월 6일이 지나서겠군,
정도만 힌트를 얻으면 된다.
그동안의 내 경험치로 보아
내장산 단풍의 절정은
11월 둘째 주.
지구 온난화까지 감안하면
올해는 11월 10일~14일 정도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마음이 너무 근질거렸다.
그래서 갔다.
금요일부터 주말까지는 사람이 몰릴 테니
나름 머리를 써서 목요일 오후 세시 무렵.
일단 평일이면서,
아침 일찍 들어간 사람들이 빠져나갈 시간이라
내장산 속으로 무리 없이 들어갈 수 있다.
천천히 걷고
지나온 길이 아까워서 돌아보고...
단풍에 시선을 뺏겨 걸음을 자꾸 늦추게 되는 길.
자연이 빚어낸 이 색채의 향연을 보고
'색색의 물감을 풀어놓은 듯한'이라는
진부한 표현 밖에 떠오르지 않는
나의 비루한 표현력이 아쉽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림 같다'라고 하는 것은
그 느낌이 뭔지는 알면서도
자연이 그림보다 더 아름다운데,
자연을 예찬하면서 그림에 비유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 든다.
단풍나무 아래 앉아
빨강에,
다양한 색채에 감탄하며
호호 불어가며 따뜻한 차를 마셨다.
올해 단풍 갈증은 충분히 해소되었다.
(아마도
내장산 단풍은
11월 20일에 정점을 찍고 다음 주말까지는 예쁠듯하다.)
첫눈은 언제쯤 오려나?
사진 속 날짜를 보니
1996년 11월 3일, 일요일이었다.
그날 나는
우리 반 아이들과
시내버스를 타고, 직행 버스를 타고,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내장산에 갔다가
또 그렇게 돌아왔다.
단풍 시즌이었으니
버스는 사람들로 가득 찼을 것이다.
내장산의 단풍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저런 무모한 도전을 서슴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를,
문득 칭찬해주고 싶다.^^
단풍이 얼마나 예쁜지 잘 모르면서도 따라왔을
우리 아이들도 기특하다.
돌아보니
참 따스한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