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어느 날 그는 여자에게 지금 마산에 있느냐고 물었다. 대뜸 마산에 내려갈 거라고 말했다. 여자는 스치는 기대감을 애써 숨긴 채, 무슨 일로 오시냐고 물었다. 어머니 칠순 잔치 때문이라고 했다.
어머니, 그는 어머니를 뵈러 오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고향을 다시 찾는 사람이었고 실망스럽게도 내려오는 김에 그냥 여자의 얼굴이나 한번 보려는 것이다. 여자의 기대는 다시 쪼그라들었다.
여자는 오후 시간대로 기차 시간을 검색해봤다. 4시 20분 출발, 7시 20분에 도착하는 KTX가 있었다.
“어, 여기예요, 내려야 돼요!”
학창 시절 그가 자주 갔다는 등대 이야기를 듣다가 하마터면 정거장을 놓칠 뻔했다. 그래도 무사히 어시장 입구에서 내렸다.
시장 바닥은 언제나 물이 고여 있었다. 찰팍찰팍이며 여자는 수많은 물고기들의 눈알을 지나쳤다. 가끔 성게도 있고 문어도 있고 언제나 눈에 띄는 그러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빨간 비늘 물고기도 있었다. 그는 계속해서 주위의 풍경에 마음을 빼앗겨 속도가 느렸다.
여자는 열 발자국도 넘게 앞서갔다. 그러고 보니 늦은 저녁, 떡볶이집이 문을 닫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심초사하며 골목을 꺾고 나니 용케도 떡볶이 집은 불을 환하게 켜고 있었다. 낮에서처럼 사람들이 바깥에 길게 나와 줄을 서진 않았지만 여전히 안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무언가 욕심낸 것은 여자의 기억으론 떡볶이였다. 오래전 그냥 지나치려던 어느 떡볶이집 앞에서 “떡볶이 먹고 싶어요.”라고 그는 분명하게 말했다. 여자는 그가 무언가 원하는 걸 말할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언제나 그는 여자에게 무얼 먹고 싶냐 먼저 묻곤 했었다. 그것은 여자를 배려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여자에게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말을 듣는 건 여자의 귓바퀴를 간지럽히듯 낯설고 달콤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그날 떡볶이를 즐겁게 먹지 못했다. 그날은 이상하게도 하루 종일 배가 불렀다. 서로 더 먹으라고 양보하다가 기어이 떡 몇 개를 남길 수밖에 없었을 때 여자는 ‘엇갈리는 타이밍’을 생각했다.
그래서 꼭 떡볶이를 다시 먹고 싶었다. 맛있게 한 개도 남김없이 국물까지 다 먹고 싶었다. 그놈의... 떡볶이가 뭐라고.
떡볶이 집은 거울이 내벽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자는 문득 맞은편 거울에서 그의 뒷모습과 자기의 모습이 함께 있는 걸 보았다. 여자는 두 손을 가위 모양을 하고 프레임을 만들어 보았다. 마치 몰래카메라처럼, 그가 모르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소리 없이 사진을 찍으려 두 눈을 끔벅였다. 그것은 처음으로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었다.
곧이어 떡볶이가 나왔다.
“많이 잡숴요.”
“양이 별로 안 많은데요.”
꼭 이렇게 덧붙여야 속이 시원했다. 그래서 양이 적은 걸 탓하는 건지 거기다 대고 많이 먹으라 소리를 하는 그를 탓하는 건지, 나쁠 게 없는 데도 문제의 소지를 만들어 내는 건 똑똑해 보이려는 여자의 심보랄까, 여자의 주특기였다. 그는 묵묵히 떡볶이를 먹기 시작했다.
그는 떡보다 어묵을 더 좋아한다고 말을 꺼냈다. 여자는 자기는 떡이 더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음식 궁합이 맞네요.”라는 말을 떡과 함께 삼켰다.
“마산에 오셨으니까 떡볶이는 제가 살게요.”
여자는 계산을 하는 것이 오늘 제일 중요한 일인 것처럼 나섰다. 황망히 바라보는 그도 이제 면역이 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자가 너무 애쓴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여자도 알았다.
횟집은 여자가 가족들과 한번 가봤던 집이었다. 그곳에서 모둠회를 듬뿍 뜬 사진을 SNS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는 그 사진을 이야기하며 회를 먹으러 가자고 말했다. 지나가는 말을 주워 담아 그것을 기억하는 쪽은 여자였다. 미로 같은 어시장 안에서 결국 횟집을 찾아낸 것도 여자였다.
남자는 앉기도 전에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우고 여자는 좋아하는 좌식 테이블 앞에 방석을 깔고 앉았다. 다리를 쭉 펴면서 그가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왜 청바지를 안 입어요?”
어이가 없어 기가 차 친구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나보고 왜 청바지를 안 입냬... 여자를 누구보다 잘 알던 친구는 그게 무슨 말이냐며 이해를 하지 못했다. 언제나 여자는 청바지를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를 만날 때만큼은 기를 쓰고 청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걸, 발이 아프도록 구두를 신고 다녔다는 걸, 평소에 거의 하지도 않는 화장에 공을 들였다는 걸, 그는 알지 못하는 게 틀림없었다. 제 나름 끼를 부리고 있었다는 걸 몰라주는 그의 순진함에 질렸더랬다.
그래서 오늘 여자는 보란 듯이 청바지를 입고 후줄근하게 나왔다. 화장도 하지 않고 구두도 신지 않음으로써 어떤 간절함을 반쯤 내려놓은 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과연 그는 여자의 달라진 옷차림을 알기나 할까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조용한 횟집에서 유일하게 시끄러운 건 저 멀리 테이블에서 걸쩍지근한 욕설을 안주삼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먹는 아저씨들 네댓뿐이었다. 아저씨들은 계속해서 목청을 돋웠다. 여자는 휴대폰을 꺼내서 슬그머니 녹음기를 틀었다.
“어이 보소, 일로 좀 앉아 보소.”
“술맛이 밍밍하다 아이가. 와그런지 함 얘기해 보소.”
“아 좀! 이따가 부르이소.”
서빙을 하던 아주머니에게 아저씨들이 추파를 던지는 소리, 옆에서 뜯어말리는 소리, 목청을 높이며 고집부리는 소리, 술을 건네고 술잔이 쨍 부딪히는 소리. 평소라면 기분이 나빠지거나 소음 같이 들렸을 그 소리들이 갑자기 슬로 모션처럼 보이고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여자는 화면의 녹음 마이크 아래 8분의 시간이 넘어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