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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May 28. 2021

아빠와 자식



우리 집은 전형적인 4인 가족이었다.


바깥에서 돈을 벌어오시는 아빠,


안살림을 도맡으시던 엄마,


그리고 성실히 커 나갔던 나와 동생, 두 자녀들.


아빠가 우리 집의 가장이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것은 단순히 아빠가 경제권을 쥐고 있었다는 것뿐만은 아니고 집안 대소사의 결정권이 아빠에게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상하관계


학창 시절, 가끔 친구들이 "엄마/아빠랑 싸웠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왜냐면 내게 부모님은 동등한 입장에서 싸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꾸중을 맞았다'는 말이냐고 물어보면, 아니, 싸웠다고 했다. 어떻게 감히 엄마 아빠랑 싸울 수가 있지?


그러고 보면 친구들은 부모님께 반말을 하며 지낸다는 걸 차츰 알게 됐다. "엄마 아빠께 반말 써?" 내가 놀라서 물으면, "넌 존댓말 써??"라며 친구들은 더 놀랐다. 부모님께 존댓말을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심지어 존댓말을 쓰는 내가 친구들의 입장에서는 신기한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놀라웠다.


우리 집은 그렇게 엄마 아빠는 자식들이 항상 올려다보는 존재였다. 우리는 부모님께 존댓말을 썼고 꾸중을 맞았다. 반말을 써본 적 없고 어렸을 때 엄마 아빠에게 대드는 일이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빠는 엄마를 꾸짖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아빠는 이따금 엄마에게 잔소리했고, 엄마도 이에 지지 않았지만 언제나 아빠의 목소리가 더 컸다. 아빠는 엄마가 일찍 들어오라, 양말을 빨래통에 넣어라는 말들을 듣지 않았고, 엄마는 아빠가 셔츠를 다려놓으라, 애들한테 이 음식을 만들어줘라고 하는 말들을 다 주문대로 하셨다. 무엇보다 엄마는 네 살 많은 아빠에게 존댓말을 쓰셨다.  


결국 우리 집의 계급 구조는 우리들 - 엄마 - 아빠 순으로 아빠가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집인 셈이었다.



균열


너무나 당연했던 우리 집의 가장의 지위에 의문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제일 착하고 순종적이었던 첫째 딸인 내가,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순간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나는 학창 시절 그 흔한 질풍노도의 시기도 없었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쯤 뒤늦게 긴 방황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방황이란 공격적이거나 나쁜 길로 어긋나는 그런 것보다는, 스스로 깊이 침전하고 우울해하는 것이었다. 큰 시험에서 고배를 마시고 늦었지만 새로이 여러 진로를 탐색하며 고군분투했지만, 그 시절 내게 패배의 상처는 짙게 남았다. 어떠한 꿈도 희망도 없이 졸업을 맞이했고 나는 그 당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에서 며칠 동안 무단결근을 했다. 일련의 사태로 심각성이 커지자, 아빠는 더 이상 서울에 있지 말고 일단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하셨다.


고향에 내려갔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다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아픈 것을 무기로 내 감정을 여기저기 쏟아냈고 그 대상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엄마와 아빠였다. 그런데 아빠는 나를 꾸짖거나 하는 등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아빠는 많이 당황하셨던 게 분명하다. 모든 일에 계획적인 분이셨는데, 나란 존재는 아빠의 계획에서 크게 어긋나고 있었던 것이다. 계획적인 사람에게 예측 불가능하고 통제 불가능한 것이야말로 치명적인 한 방이다. 나는 부작위의 말없는 반항을 통해 아빠에게 대들고 있었다. 아빠가 인내심을 발휘하시는 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쩔쩔 매시는 게 느껴졌다. 아빠가 나를 꾸짖지 못한다는 사실은 내게도 참으로 의외의 풍경이었다.



목격


한편, 동생은 어느 순간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갑자기 교회를 다니겠다고 했다. 엄마는 주말마다 동생 보고 교회에 가서 밥 얻어먹고 오라고 말씀하신 걸 후회하셨다. 동생은 뭐든 하나에 꽂히면 그 열정이 대단했기 때문에 무섭게 성경을 파고들었다.


시험에 합격하는 등의 동생이 어떤 일을 성취할 때마다 이제 동생은 그것을 하나님의 공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다 하나님 덕분에 잘된 것 같아요." 그때까지 동생의 종교에 대해 별말씀 없으시던 아빠는 비로소 역정을 내셨다. 지금까지 키워준 건 누구고 감사 인사받는 건 누구냐는 것이다.


점점 더 동생은 더 이상 주말에 고향에 내려오려 하지 않았고 그것은 일요일에 교회를 가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부터 아빠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건 역린을 건드린 것이었다. 토요일에 올라가겠다는 딸과 이럴 거면 앞으로 내려오지 말라는 아빠의 대치는 극한으로 치달았다. 아빠는 처음에는 종교의 존재 이유와 다양한 역사적 배경들로 바람직한 종교생활에 대한 아빠의 생각을 설득하려 하셨지만 이 파릇파릇한 젊은 신도 딸은 수긍과 타협을 몰랐다. 비록 아빠는 동생을 무릎 꿇게 하시고 머리끝까지 화가 나 꾸중을 하고 계셨고 그 앞에 무릎 꿇고 울고 있는 것은 동생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동생의 행동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더 이상, 아빠는 딸의 결정권자가 아니게 되었음을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목격해 버리는 순간이었다.




무소불위의 존재일 것만 같던 아빠의 약점은

바로 자식들이었네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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