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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0. 2021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맞은 날


각종 육아 프로그램을 보면 아이들이 참 귀엽더라.


어쩜 그렇게 올망졸망 예쁘게도 생겼는지.


연예인 아빠들이라 그런지 아빠들도 CF에서 봄직한 능숙한 육아 스킬을 뽐낸다.


아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아빠에게 "최고~!"라며 말하네.


아니, 저 집은 육아 프로그램이 아니라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어린 시절의 기억


나에게 어렸을 적 기억은 별로 없다. 지금도 불과 며칠 전 기억조차 가물가물한데, 어린 시절 남아있는 기억이라고는 몇몇 단편적인 풍경들밖에. 예를 들면 마루에 놓인 돌려서 거는 전화기에 손가락을 뽕뽕뽕 집어넣던 기억, 차 안에서 손잡이를 돌려서 낑낑대며 올리곤 했던 유리창, 이불보 겉자락에 달려있던 면 레이스의 보드라운 촉감 같은 것들......


이런 마당에 아빠의 기억 또한 남아있을 리 만무하다. 아빠는 집에 늦게 들어오셨고 대부분의 시간은 엄마와 함께하며 지냈다. 얼마 전 썼던 글에서 말했듯이, 난 아빠의 첫인상이 초등학생 무렵이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고 기억한다.


그런데 유일하게 내가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아빠를 기억하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바로 아빠에게 맞은 날의 기억이다.


아빠는 어쩌면 억울하실 수도 있겠지. 근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 왜 유년시절 아빠의 기억이 하필이면 맞은 날일까. 옛날 앨범을 뒤져보진 않았지만 아빠랑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있을까? 왠지 모르게 확신이 없네. 나의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기억력을 탓하며, 부디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영악한 말 한마디


아마 백화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을 것이다. 차 안에는 네 가족이 타고 있었다. 아파트 정문에 들어와서 그 앞에 있는 아파트 상가에 엄마 아빠는 잠시 볼일을 보러 나가셨다. 그게 세탁소였는지~ 처갓집 양념통닭을 사러 가신 거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아무튼 두 분이 차 안에서 자리를 비우자, 나는 뒷좌석 창문으로 엄마 아빠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뭐시라 뭐시라~ 뭐시기 저시기~ (대강 욕설이 난무)"


왜 욕을 했냐고? 엄마 아빠가 백화점에서 장난감을 사 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부모님에게 그 당시 어린아이들이 하기 힘든 욕을 지껄였던 듯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유일한 목격자이나 나의 단짝, 두 살 어린 동생이 고스란히 그 욕을 듣고 있었다.


부모님이 차에 다시 돌아오시자, 동생은 말했다. 언니가 "뭐시라 뭐시기" 라고 말했다고. 그때 난 무척 당황했다. 동생이랑 싸웠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래서 그게 엄마 아빠께 이른 건지 아니면 그냥 "언니가 이렇게 말했어요" 라며 별생각 없이 말한 건지 약간 가물가물하다. 내 동생은 어린 시절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따라 했다. 그래서 아마 무심코 언니가 한 말을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다시금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동생은 그때 그게 욕이란 걸 알고 있었던 듯하다. 분명히 그건 고자질이었다.


그때 부모님은 매우 놀라셨다. 애가 욕을 아는 줄도 몰랐는데, 그게 엄마 아빠를 상대로 한 욕이었으니. 두 분은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시금 재촉했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냐고 다그치셨다. 나는 험악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이 말을 듣자 아주아주 큰일 났다 싶게 가슴이 철렁했다.


"집에 가서 보자."


집에 가자마자, 제단에 불을 피우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아빠는 돌변했다. 거실에 자리를 깔고 앉아 나를 혼내셨다. 엄숙한 분위기에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얼어버렸다. 기어이 다그치시자 "잘못했어요"라는 말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던 듯하다. 아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매'를 갖고 오라고 엄마를 시켰다. 엄마는 기다란 구두솔을 갖고 오셨다.



체벌의 기억


어렸을 적 체벌이란 드문드문하지만 존재하는 기억이다. 하지만 엄마 아빠 두 분의 합의가 되셨던 건지, 오로지 엄마만 우리를 때렸다. 그리고 엄마는 항상 정해진 매, 구두솔로만, 정해진 곳, 우리의 손바닥에만 때리셨다. 그리고 엄마는 항상 내가 왜 맞는 건지 물어보신 뒤 몇 대를 맞을 거냐고 물어보셨다. 내 생각에는 엄마도 나름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우리를 훈육하시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다.


주로 나와 내 동생이 지긋지긋하게 싸우는 것 때문에 엄마는 매를 드셨고, 몇 대를 맞을 거냐는 엄마의 물음에 나는 당연하게도(?) '한 대 맞겠다'라고 대부분 말했으므로, 손바닥 한 대를 맞는 건 사실 견딜만했다. 그런 체벌마저도 엄마는 내가 중학생이 되자, "너희도 다 컸으니 이제는 더 이상 너희를 때리지 않을 거다"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요즘에 들어서는 어떠한 체벌도 용납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지만, 몇십 년 전 나의 어린 시절엔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맞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게다가 나보다 더한 어린 시절을 보내셨을 부모님의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그러한 정도의 체벌은 충분히 그럴 만했다고 수긍한다.


하지만 이날은 무척 예외적인 날이었다. 한 번도 아빠가 우리를 그렇게 혼내본 적이 없었고 아빠가 때린 적은 더더욱 없었다. 아빠는 그날 어린 나의 엉덩이를 때리셨다. (아마 거기가 제일 살이 많아서였겠지..) 그리고 나는 몇 대를 맞았는지도 모르게 꽤 많이 맞았다.


엄마는 그러고 나서 내 엉덩이에 약을 발라 주셨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오자 찔끔찔끔 울던 것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빠 대신 엄마밖에, 엄마는 내 편일 것만 같아 서러움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엄마는 싸늘한 눈빛으로, "예뻐서 약 발라주는 거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로


아빠는 그날 이후로 나를 때리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나시더라도 (내가 아무리 아빠를 화나게 해도) 예전부터 그러셨듯이 아빠는 딸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으셨다.


그래서인지 그날 아빠는 왜 때리신 걸까 오히려 궁금한 생각마저 든다. 처음으로 욕을 했지만 부모님께 욕을 했다는 건 패륜의 의미라는 사안의 심각성 때문이었을까? 다시금 떠올리니 엉덩이가 아픈 것 같아서 그때 어린 시절의 내가 불쌍하기도 한데, 아이를 때리고 있었을 아빠의 심정은 어땠을지 이젠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때 이후로 아빠 또한 상당한 충격이지 않으셨을까, 본인 스스로 체벌을 했다는 그 자체로 마음이 아프지 않으셨을까. 그래서 어쩌면 그 이후로 더 체벌은 단념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으론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하는 아이가 내 손에서 자라고 있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고민도 된다. 아빠의 체벌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일단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빠에게 맞은 날은, 참 뜨겁고도 가슴 서늘해지는 기억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욕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날의 기억이 지배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욕에 관한 나의 기억은 백지장처럼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때쯤, 주변 친구들이 욕을 많이 쓰기 시작하면서 '왜 나는 욕을 안 쓰지?'라고 스스로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었고, 그제야 내가 욕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나에겐 없는 단어가 된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생각으로라도 욕을 할 수가 없어 가끔은 답답함을 느낄 때마저 다. 하지만 욕은,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리고 그것은 아빠가 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때린 날 덕분이었다. 그것만큼은 사실 아빠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아빠는 내게 진한 체벌의 기억 평생 습관을 동시에 안겨주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에게 맞은 날.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은 
아빠도 많이 아프셨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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