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보면 사진 속에서 매년 키가 훌쩍 자라는 게 보였다. 어느새 동생은 아빠보다 커졌고 나도 아빠와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 아빠가 나이들어감에 따라 자식들은 커 갔다. 우리들의 키가 커질 수록 아빠의 키는 작아지는 것 같았다.
비단 키뿐만이 아니다. 머리도 커지고 목소리도 커졌다. 어렸을 적엔 무조건 아빠의 말대로 '~하자'라시던 아빠는 언젠가부터 우리의 의견을 존중하는 듯 '~할까?'라고 물어보셨고 요즘엔 우리가 먼저 의견을 말하면 '그럴까?'라시며 따르려고 노력하신다.
어쩌면 지금이 제일 좋은 순간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힘은 우리의 힘과 반비례한다. 그리고 지금은 아빠와 우리가 마주하는 순간. 아빠와 나의 발언권이 동일해지는 순간. 이제는 더이상 아빠와 딸이 어른 대 아이의 모습이 아닌, 어른 대 어른이 되었음을 느낀다.
야속한 시간이 흘러 아빠의 힘은 점점 더 약해지실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듯 아빠는 우리 집의 가장이시지만 조금씩 아빠는 결정권을 내려 놓기 시작하셨다. 나의 진로 문제나 동생의 결혼 문제 등에 대해 더이상 모든 걸 다 결정하시려고도 하지 않는다. 말씀의 권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말씀은 더이상 권력이 아니다.
아빠는 과연 상실감을 느끼실까?
물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빠는 오히려 홀가분하실 것 같다. 가장의 권한은 사실 많은 책임이 따르는 것이다. 아빠는 책임감을 덜 수 있다. 항상 가족 여행을 갈 때에 아빠가 어디에 갈지 결정하고 출발했지만,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우리가 준비했을 때, 아빠는 우리가 짜 놓은 여행 계획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을 기꺼워 하셨다. 오히려 기다리셨다는 듯 '그 다음은 뭔데?'라시며 즐거워하셨다. 어쩌면 아빠는 우리가 나서서 행동해주길, 결정해주길, 아빠를 끌어주는 든든한 딸이 되어주길 바라고 계실 것이다.
아빠의 마음이 어떠하든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난 아빠가 약해지는 게 두렵다. 내가 생각하는 아빠의 첫인상을 간직하고 싶은 것처럼, 아빠가 언제나 젊고 힘있고 자신감넘치는 모습이셨으면 좋겠다. 아빠의 나이든 모습은 그러한 변화 자체로 적응하기 힘들다.
물론 내가 아빠의 품 안에서 떠나는 것이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도 맞다. 아빠가 약해지실 수록 나는 강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내 한 몸 건사하는 것이 목표인 내가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만약에 내가 아빠를 책임져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아빠만큼 우리집 가장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난 조금 다른 그래프를 상상해 본다. 아빠의 힘은 물론 약해지시겠지만 여전히 내가 아빠를 이길 수 없었으면 좋겠다. 조금은 효자의 심정으로, 많이는 불효자의 심정으로 아빠의 힘이 그대로였으면 한다. 아빠가 너무 약해지시지 않기를 바라며 아빠가 언제나 우리집 가장이시기를 바라며.
아버지와 자식의 그래프는 응당 '그래야' 할 것이지만, 아빠와 나의 그래프는 좀 달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