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May 26. 2021

아빠의 세계


오래된 기억 중에 하나는 바로 가족신문을 만들 때다.


아빠는 1면 가족 소개를 하는 부분에서 이렇게 쓰라고 불러주셨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그땐 '유복하다'라는 말 뜻도 몰랐지만 그래서인지 무척 인상 깊었다.


지나고 보면 그것은 아빠에게 꽤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아빠가 이루고 싶었던 것, 그리고 이루어 낸 것.


바로 유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김과 분홍 소시지


아빠는 자주 김 얘기를 하셨다. 할머니께서 큰 형들에게만 커다란 김 한 장을 주고 아빠와 작은삼촌은 감히 김 한 장도 욕심내지 못했던 시절 이야기였다. 김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부엌 찬장에 있는 김을 몰래 꺼내먹으려다가 그만 부뚜막에서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치셨다고 했다. 아빠는 철길 바로 옆 5남매가 살던 가난한 집에서 자라셨다.


분홍 소시지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먹지도 않으시면서 분홍소시지를 사느라 마트에서 엄마와 자주 실랑이를 벌이곤 하셨다. 어렸을 때 부잣집 친구의 도시락에서 분홍 소시지를 어쩌다 얻어먹곤, 아빠는 그게 아직까지 기억에 사무치시는 게 분명하다.


지금은 김 열 장, 백 장도 사 먹을 수 있게 되었고 분홍 소시지는 사놓은 걸 잊어버리고 또 사기 일쑤지만, 아빠는 언제나 김과 분홍 소시지가 수중에 없는 것처럼 항상 아쉬운 마음을 품고 계셨다. 그것들을 보노라면 흑백 티브이 같은 옛날 기억이 오늘날 아빠의 세계에서는 컬러풀해질 수 있었다.



차근차근 쌓아 올린 세계


가난했던 아빠의 어린 시절과 달리, 나의 어린 시절은 김을 못 먹어서 서러울 것이란 걸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사람마다 부유함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우리 집은 잘 사는 집이었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 당시에 유행하던 것들을 다 살 수 있었다. 80년대 중산층의 상징이었던 어항과 난초부터 시작해, 집채만 한 커다란 전축이 있었고 오븐이 딸린 가스레인지가 있었고, 우리 집에는 화장실이 두 개가 있고 자가용이 두 대나 있었다.


그때는 이게 대단한 줄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한 거였다. 갑자기 떼돈을 벌어서도 아니고, 아빠는 차근차근 가족들의 삶의 질을 높여가셨다. 맨 처음 기억나는 우리 집 차는 수동으로 창문을 열던 프라이드였는데, 나중에는 앞뒤로 길쭉한 중형차 프린스로 바뀌었고, 또 나중에는 그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그랜저로 탈바꿈했다. 아빠의 나이 30대 중반부터 50이 되실 때까지, 어른이 되어서도 아빠의 세계는 성장을 계속했다.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이제 아빠의 나이로 접어든 내가 비로소 깨닫게 되는 사실이었다.



계단 앞에서


아빠는 가난한 집에서 자수성가하여 중산층으로 한 계단 성큼 올랐다고 자평하셨다. 경제적 지위를 계급화하자면 가히 신분상승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아빠가 상상해낸 장밋빛 미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고 아빠는 또 다른 계단을 마주하고 계셨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또 한 단계 넘어서는 것. 그것은 바로 대를 이어 아빠의 자식들이 이루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언제나 계속될 것만 같았던 아빠의 성장은 그러나 허무하게도 그다음 계단 앞에서 멈추어 버렸다. 자식들은 서울로 떠났고 거의 내려오지도 않았으며, 가끔씩 만날 때마다 자식들이 꺼내는 얘기는 아빠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점점 더 어긋나는 것처럼 보였고 점점 더 실망이 쌓여갔다. 아빠의 세계에서 최대 변수는 바로 자식들이 아닐까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것도 오래된 일이지만,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던 걸 기억한다.


"아빠께 전화 좀 드려라."


왜냐고 묻는 나에게 엄마는 정말 낯선 단어를 꺼내드셨다.


"아빠가 요즘 많이 '우울'하셔. 옛날의 아빠가 아니다."


언제나 목표와 계획이 있으셨고 항상 추진력 있게 나아가기만 했던 모습이 익숙한 아빠였다. 그에게 우울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아빠에게 그런 감정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낯설었다. 언제나 우울함으로 치닫는 건 나였기에, 주변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나는 우리 아빠가 그렇게 '나약한' 분이 되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울함이 나약한 것이라고 동일시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일 년 정도는 아빠는 옅은 우울증으로 보내셨다. 평소 말투와는 다르게 항상 다정한 표현, 사랑표 이모티콘이 마침표 다음에 콕콕콕 박혀있던 아빠의 문자 메시지... 어느새부턴가 메시지는 더 이상 도착하지 않았다.


아빠는 예상치 못했던 미래이자 현실을 그의 우울함과 맞바꾼 채, 지금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오르지 못한 나머지 계단 앞에서.




내 인생에 불만을 느낄 때가 있다면,
바로 아빠를 생각할 때다.

나는 아빠 꿈의 일부였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이루지 못한 꿈이었기 때문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