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May 31. 2021

아빠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빠는 항상 누군가에게 '주는 사람'이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익숙한 그런 사람.


사람을 둘로 나누어 보자면,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빠는 자신이 주는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고 계시는 듯했다.


반은 체념, 반은 책임감과 함께 항상 주려고 하셨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엔


오랜만에 집에 내려갔더니 집이 많이 낯설다. 뭔가 바뀐 것 같은 느낌에 거실을 응시하며 몇 초간의 로딩 후, 나는 곧 눈이 휘둥그레졌다.


"엄마, 이게 다 뭐예요??"


갑작스레 집안의 가구가 다 바뀌어 버다. 거실에는 웬 낯선 3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가 거실 한 벽면을 꽉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 흔한 디자인이 아니었는데, 소파 치고 등받이 부분이 지나치리만큼 높았다. 내 평생 이런 소파를 난생처음 보았다. 등받이 부분에 비해 앉는 자리는 너무 짧아서, 앉은키만 큰 난쟁이 같은 느낌으로 우스꽝스러운 소파였다.


예전엔 없던 거실용 탁상도 생겼는데, 저기 구석에 처박혀서 움직여 보려고 했더니 무슨 대리석인지 뭔지 엄청나게 무거워서 도저히 사람 몇 명이서도 끌 수조차 없는 탁상이 거실 한쪽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부엌에 있는 식탁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있던 단아한 우드블랙 색깔의 나무 식탁은 어디 가고, 갑자기 붉은 대리석 패턴의 (엄마의 표현으로는 '소고기 마블링 같은' 모양의) 식탁이 참으로 부담스럽게 부엌을 꽉 막아서고 있었다. 식탁 의자는 또 뜬금없는 베이지색에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가운데에는 누가 봐도 가짜 큐빅이 총총총 박힌... 한마디로 촌스러운 의자가 여섯 개나...... 있었다.


"엄마, 뭐예요 이거~ 설마 사신 거예요??"


대답을 재촉해도 도통 말씀이 없으셨던 엄마는 그저 씁쓸한 웃음만 지으실 뿐이었다.


"몰라. 아빠한테 여쭤봐."


알고 보니, 무려 4천만 원짜리 가구들. 물론 실제 소파와 식탁의 가격이 4천만 원이란 말은 아니다. 아빠가 친구분께 돈을 빌려주셨는데, 그 친구는 몇 년 동안 돈을 갚지 못하고, 결국 빌린 돈 대신 그 가구들로 갈음해서 주셨던 것이다.


나도 기억난다. 어렸을 적엔 라자가구 아저씨였다. 옛날에 우리 집에 있던 침대와 장롱 같은 것들도 그 가구점을 하시던 친구분 가게에서 산 것들이다. 그런데 몇 년 전 그분은 중국으로 사업을 확장하시느라 아빠께 3천만 원을 빌리셨는데, 갚지도 못한 채 돈을 더 빌려달라고 하셨나 보다. 아빠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천만 원을 더 빌려주셨다. 참으로 바보 같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빠가 상상이 된다.


물론 아빠의 친구분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셨을 것이다. 염치가 없는 분은 아니셨다. 아빠와 함께 돈을 빌려준 친구들을 중국으로 초대해 몇 박 며칠로 멋진 구경을 풀코스로 시켜주시고, 자신의 중국 가구점에 있는 제일 좋은 것들을 고르라고 해 가구들을 주셨다. (엄마는 솔직히 말해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나마 제일 무난한 걸로... 그래 봤자 너무나 중국스러운 -부담스러운 화려함을 추구하는- 디자인의 가구들을 골라오시게 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생긴 우리 집 소파와 식탁은 그런 사연이 있는 값비싼 물건이었다. 문제는, 우리 집엔 이런 물건들이 꽤 많다는 것이다.



선물의 의미


갑작스레 들어온 집채 만한 그림 몇 점, 어느 날 생긴 커다란 나무 벽걸이 장식품들, 수십 권 가득 들고 오시는 어느 작가의 책들, 가끔씩 아빠가 들고 오시는 고오급스러운 양과자 세트, 어느 날 집으로 배달된 엄청나게 싱싱한 전복, 문어 등지의 해산물 아이스박스, 한정판 자연산 송이버섯 몇 박스, 명절이면 한가득 들어오는 고오급 과일 등등...


예전에는 멋도 모르고 신기하고 고마웠다. 이런 것들을 보내주시는 아빠의 지인 분들이 너무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이런 물건들이 왜, 아빠께 배달돼 오는 지를 안다. 요즘도 가끔 들어오는 그런 물건들을 보자면 씁쓸해지기까지 한다. 틀림없이 아빠가 돈을 빌려주셨거나 약을 공짜로 지어주셨기 때문일 것이다. 아빠의 호의와 그분들의 마음은 물론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것이겠지만, 아빠가 그런 선물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기껍게 받으시는 걸 보면 대충 짐작이 간다. 적어도 그런 값비싼 물건들 아빠의 호의를 조금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어느 정도 감사 표시를 한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심지어 큰어머니와 작은 큰어머니가 명절 때마다 사 오신 우리 자매의 원피스, 가방 같은 것들도 그냥 선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집이 제사를 지내니까 제사비용을 대신해서 사 오신 것인 걸까. 어쩌면 그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럴 때면 내가 쓸데없이 세상을 많이 알아버린 기분이다. 알고 싶지 않았던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영원불멸의 이치를 말이다.



제일 큰 수혜자


아빠가 번 돈을 아빠가 누구에게 빌려주시든, 나는 뭐라고 왈가왈부할 자격은 없다. 오히려 아빠 덕분에 어린 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주변 분들에게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 매번 맛있는 음식을 얻어먹고 매번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주시던 아빠의 지인분들은, 그 이유는, 모두 아빠에게서 많은 걸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아빠보다 훨씬 더 부자인 친구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빠가 제일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주시고 후원해 주셨다. "아빠가 여기저기 빌려주신 돈들을 다 합하면 얼마나 될까요?" 하고 엄마께 여쭤봤지만, 엄마는 알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아빠는 정이 많아 거절을 잘 못했고 어지간한 오지랖으로 재능이 있는 어려운 친구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또 문제는 수중에 돈이 부족하지 않았다. 아빠는 말씀하시길 '이성적으로 판단 후' 빌려주신다고 했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적어도 가족의 생활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빚보증을 서거나 무리하게 돈을 빌려주신 게 아니었으니까. (물론 어마어마한 금액을 '이성적으로 판단 후(?)' 차용서도 안 쓰고 빌려주셔서, 엄마가 나중에 알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빠 몰래 차용계약서를 써서 직접 도장을 받으러 가신 적도 있다. 아직도 그 돈을 받을 길은 요원하고 이렇게 가끔 엄마의 속을 썩이기도 하시지만... ) 그저 아빠는 스스로 말씀하시길 '항상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셨던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누구에게 가장 많이 주셨을까?


나는 생각한다. 아빠는 내게 너무너무 많은 것들을 주셨다. 아빠에게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아빠 친구들도 친척들도 아닌, 바로 나, 우리 자식들이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책도 사 주시고 옷도 사 주시고 대학교도 보내주시고 삼시세끼 먹여주시고 매년 그 비싼 보약을 공짜로 먹여주셨다. 그뿐만일까. 온 마음을 다 주셨다. 아빠니까 당연한 거라고? 이제 세상을 알아버린 나는 누구든 당연하게 모든 걸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아빠와 자식 간에는 어찌 세상의 이치가 통하지 않으리오. 애지중지 키워 주셨고, 그것은 온 마음을 다 주셨는데도 이놈의 자식 놈은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말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 내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면, 나는 최소한 소파 한 짝도 아빠께 갚지 못하고 염치도 없이 매번 아빠의 마음을 공짜처럼 받아먹었던 것 같다.


자식들에게 투자를 하는 것은, 친구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돈을 갚을 걸 기대하지 않는 일보다 더한 일. 그럼에도 아빠는 매년 매일같이 매 순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고, 주고, 또 주시고. 아빠는 여전히 되돌려 받을 확률이 거의 없는, 자식들이라는 기약 없는 복권을 긁고 계신다.




아빠는 주는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람.







이전 07화 아빠 같은 남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