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별 Jun 03. 2021

아빠는 키우는 게 습관이라


나는 한 번도 물 주지 않던 다육이가 있었다.


한 번도 밥 주지 않았던 물고기도 있었다.


벤자민 나무는 우리 집 거실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도 몰랐다.


내가 먹었던 달걀이 껍데기가 되어 벤자민 화분에 동글동글 놓여있는 걸 보고 깨달았다.


우리는 같은 밥 먹고 있었나 보구나.


우리 집엔 나 말고도 아빠가 주는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빠는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생명을 키우고 계셨다.




물 주기


어느새 우리 집엔 다육이가 온 베란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는 걸, 어느 햇빛이 환한 날 알게 되었다. 고무나무, 동양란, 커다란 선인장 같이 큰 화분들도 있지만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줄지어 있는 것은 작고 귀여운 다육이 화분들이다. 참으로 각양각색이라, 가만히 있는데도 이리 꿈틀 저리 꿈틀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개가 주렁주렁 새끼들에게 한가득 정신없이 젖을 물리고 있는 것처럼 베란다에는 동그랗고 한주먹 크기밖에 안 되는 화분들이 오밀조밀 크고 있었다.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면 거실에서부터 베란다의 기운이 쏴 하고 시원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데, 어김없이 아빠께서 화분들에 물 주신 날이다. 자주는 아니고 몇 주에 한번, 혹은 한 달에 한번, 아빠는 한 아이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호스로 물을 주셨다. 물을 주신 건지 베란다 청소를 하신 건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빠의 사랑은 넘쳐흘렀다.


아빠가 물을 주는 게 여태껏 당연했음에도 이젠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빠께서 "나밖에 물 주는 사람이 없다"라고 말씀하신 뒤에야 한번도 물을 주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물 줄 생각조차 못하고 사실 화분들에 관심을 전혀 쓰지 못했다. 눈에 띄지 않을 래야 띄지 않을 수가 없는 아이들인데... 나는 참 무관심하다 못해 무정한 사람이었다.


가끔 다육이한테서 돋아나는 얇은 꽃줄기가 있으면 그게 뭐라고 깊이 들여다보시는 아빠. "아이고~ 아이고~ "라시며 무척이나 감동하신다. 차곡차곡 마음속에 아껴두고 모아놨다가 기다렸다는 듯 꺼내 보이는 감탄사였다. 아빠의 마음속엔 사랑이 그득한데, 그 사랑을 꺼내보이고 싶어도 다육이들 말고는 꺼내보여 줄 대상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없는 아이들에게 애정을 갖는 아빠를 보면서 조금은 애처롭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밥 주기


아빠가 물 주시는 건 화분들뿐만이 아니다. 안방에 있는 커다란 장독 어항에도 물을 주신다. 가만히 있는 것 같아도 실상 어쩜 그렇게 빨리 물이 증발되는지, 2주에 4리터 정도는 금방 없어지고 또 물을 채워 넣어야 한다. 어항의 수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뒤덮은 수초는 어항 너머 건너편 어항에도 가지를 뻗쳤고 또 그 건너편 어항까지 이파리는 무성하다. 깊이 파인 장독대 뚜껑같이 생긴 어항이 세 개나 있다.


무성한 수초를 들여다보면 그 아래에는 보이지도 않는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손톱만큼 조그마한 그 아이들이 살아있는 건 오로지 아빠 덕분이다. 아빠는 아침마다 때에 맞춰 물고기들 밥을 주신다. 가끔 아빠가 엄마와 대화를 하며 자연스레 뚜껑을 열고 밥을 주시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서처럼 보여, 어쩌면 아빠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습관이 아닐까 하고 느껴질 때도 있다.


잘 보이지도 않고 말도 안 통하고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것 같은데, 물고기는. 그래도 아빠는 꿋꿋이 물고기 밥을 챙기신다. 그 아이들이 아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물고기 밥을 다 먹어간다며 바닥을 보이는 빈 통을 보자마자, 행여나 물고기 밥이 떨어질 새라 얼른 또 새 밥을 구해오신 걸 보면, 아빠는 누군가 조그마한 생명이 자신의 손길로 밥을 다 먹어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시는 것 같았다.




마당 있는 집


아빠는 마당 있는 집을 꿈꾸셨다. 그리고 마당 있는 집을 꿈꾸는 이유는 개를 키우고 싶으시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항상 입버릇처럼 조용한 시골에 가서 마당에서 개 키우며 살고 싶다시던 아빠. 지금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핑계로 엄마는 개를 키우는 것에 반대하셨고, 아빠는 그래서 개 대신 말없이 조용한 다육이들만 키우고 계신다.


아빠께 무슨 개를 키우고 싶으시냐 물어보니 "스피츠"라고 말씀하셨다. 처음 듣는 종이어서 찾아보니 사모예드 품종을 개량한 작고 하얀 개라고 한다. 보송보송한 털이 목화꽃같이 하늘거리는 아이가 마당에 뛰어놀 걸 상상하니 아빠의 마당 있는 집이 한결 동화 속 풍경처럼 그려졌다.


'커다란 진돗개 키우고 싶어 하실 줄 알았는데...' 아빠의 손이 투박하다고 해서 우악한 개가 어울릴 것이라 생각한 것은 잘못이었다. 아빠도 손끝에 닿는 것조차 조심스러울 정도로 작고 귀여운 걸 좋아하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육이도 물고기도, 그러고 보면 아빠가 키우는 것들은 모두 다 조그마 조그마한 아이들이었다. 아빠가 좋아하고 꿈꾸고 그리는 것들이 참으로 의외인 걸 보면 내가 아빠를 너무 몰랐나 싶은 마음이 솔직히 든다.


아빠는 지금도 마음만은 베란다와 어항,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계시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자식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작고 귀여운 모습을 어쩌면 다른 아이들로부터 감동을 받고 계셨다. 예전엔 아빠가 젊은 시절에라도 아기에게 젖병을 물리거나 하는 등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지금 나이 들어서 아빠가 이렇게 무언가를 키우고 계시는 모습을 보면 아빠는 확실히 아이들을 키웠던 분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 같다.


만약에 나중에 꿈에 그리던 작은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면 아빠는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리고 마당 있는 집에서 손주를 처음으로 안게 된다면 얼마나 귀여워하실까. 아빠는 언제나 무언가를 키우고 계셨다. 그리고 언제라도 더 무언가를 키우고 싶어 하신다. 참말로 그러고보면 아빠가 꽁꽁 묻어두고 계신 열정과 사랑은 아직도 못다 피운 꽃 같아 보인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이젠 베란다로 옮겨 놓은 벤자민


자식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부족한지라
아빠는 키우는 게 습관이 되셨지.

사랑을 나누어주는 게 습관이 되셨지.





이전 08화 아빠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