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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별 Jun 13. 2021

아무리 애써봐도 기대하지 않으려 해도 '착한 딸'


내가 착한 딸이라는 생각은 별 의심 없이 해 온 것이었다.


아빠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쓰고 아빠에게 반항 한번 해본 적 없고


가출이니 일탈도 없이 특별히 엇나간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그래서 "딸이 예쁘고~ 착하네~ "라는 말을 종종 해 왔다.


'나는 착한 딸이다.'


스스로 그렇게 세뇌시켜 왔던 것 같다.


언젠가 아빠의 한 마디 말씀을 듣기 전에는.




네가 착한 줄 알고 있지?


오래전이라 전후 사정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는 내게 말씀하셨다.


"니가 착한 줄 알겠지만, 착한 아이는 아니."


비유하자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처음 듣는 사람의 기분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떻게 아빠가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지?' 그 말이 내게 일으킨 파장은 단순히 기존에 알고 있던 (믿고 있던) 사실을 전복했다는 그 자체로 놀라웠을 뿐만 아니라, 한동안 사고의 정지를 일으킬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는 '내가 착한지 안 착한지' 오로지 그 진실을 알고 싶은 집요한 마음이 더 컸다.


내가 정말 착한 딸이 아니었다고?


아빠는 사실 홧김에 그런 말씀을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어딘가에 한탄이거나 또는 분풀이를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믿음이 없으면 배신감이 들지도 않을 것이다. 어쨌든 간에 나는 아빠께 믿음을 주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사실  큰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빠와 엄마별다른 근거 없이 과도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도록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실망의 근원


나의 10대는 내리막길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평탄한 길을 걸어왔다. 누구는 고액과외를 하고 누구는 유학을 가고 누구는 예체능으로 빠지고,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주변의 많은 골치 아픈 시도를 해 왔던 것과는 달리, 나는 1학년을 마치면 2학년이 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차근차근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무리 없이 곧잘 공부도 잘 해냈다.


 아빠는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좀 더 많은 기대를 하셨다. 대학의 수준이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조심스레 재수를 권하셨다. 하지만 나는 결국 재수를 선택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얼떨결에 들어간 대학에 적응하지도 못했다. 법학과에 들어갔음에도 뚜렷한 법조인의 길에는 뜻이 없어 보여 아빠는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똥수를 찾지 못하고 뒤늦게 시험공부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빠는 "시험공부하지 마라"고 말씀하셨다. 그땐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제서야 아빠는 나의 분수를 파악하셨던 듯하다. 나의 성향이 진득하게 공부를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셨기에 애초에 이성적으로 판단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난 아빠를 조르고 졸라 설득한 끝에 결국 사법시험 공부를 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아빠는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하셨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빠의 우려는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집에서 공부를 한답시고 고향에 내려와 엄마 아빠께서 TV 소리도 크게 틀지 못하실 정도로 딸을 상전처럼 받들고 지내셨는데, 정작 그 딸은 막판에 불합격의 기운이 드리우자 마주할 진실을 회피하려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폭식을 해댔다. 아빠는 시험장에도 가지 않으려는 나를 기어코 시험장에 들여다 놓으셨다. 결국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끌려가서 나 스스로 만들어 놓은 무덤에 스스로 드러눕는 심정으로 하루 종일 시험을 치렀다.


아빠는 적어도 내가 포기하지는 않길 바라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훗날에라도 시험을 치르지 않았던 것으로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다. 결국 나는 성적표에서 작년보다 더 낮아진 점수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합격하지 못했단 사실보다 더, 내가 포기를 했다는 사실은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았다. 그건 딸에 대한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무언의 안간힘


다시 새로운 여러 도전으로 실패의 기억을 애써 지워보려던 나는 결국 졸업을 앞두고 또 무너지고 말았다. 남들은 시험에 합격하고 로스쿨에 합격한 채로 졸업을 맞이하는데, 나는 빈털터리로 졸업을 한다는 사실에 그저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빠 엄마를 서울에 보냈고, 졸업식 당일날에도 뻗대고 준비조차 하지 않으려는 딸을 두고 엄마는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시고야 말았다. 결국 어째 저째 졸업식날 밖으로 나갈 수 있었고, 졸업식이 다 끝나가기 직전 겨우 몇몇 친구들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 후 나는 점점 더 우울증이 심해져 갔다.


엄마와 함께 병원을 전전했지만, 아빠는 병원을 다니는 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아셨다. 아빠는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하셨다. 아무렴 내가 어디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이 자포자기한 채로 나는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완벽한 패배자의 모습을 한 채로였다.


눈에 초점이 없고 아무런 의지가 없는 나를 보면서 엄마는 많이 우셨다. 하지만 아빠는 정말 딱 환자처럼 나를 대했다. 다만 매일 밥을 먹고 산책을 하도록 그것만은 꼭 시키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를 두고 별다른 감정표출 없이 무미건조한 것처럼 보이시던 아빠의 모습은 어쩌면 다른 근심과 걱정을 최대한 숨겨놓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또는 아빠 또한 당황스러운 딸의 몰락에 함께 무너지지 않기 위해 최대한 마음을 방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내가 산책을 가지 않으려고 고집부릴 때를 제외하곤, 화를 내지 않으셨다. 말씀도 없이 나를 지켜만 보셨다.


 

언제나 조마조마


다행히도 난 약 6개월 동안 요양을 하며 조금씩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아직은 불안 불안했지만 그래도 서울로 올라가더니 비교적 이르게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아빠는 최종면접을 앞두고, "꼭 붙어야 할 텐데"라고 오랜만에 그런 간절한 기대를 보이셨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걸 보면서, 나는 그제서야 죄송함이 몰려왔다.


아빠는 그동안 내게 부담감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 같았다. 아빠로서 당연히 딸에게 기대를 하기 마련인데, 이제는 그게 사치스러운 감정이 된 듯, 행여나 딸이 또 과도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또는 아빠 스스로 또 실망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감정을 숨겨오셨던 것 같았다. 나는 아빠께서 딸에게 애써 기대를 하지 못하고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제약을 씌워드린 것 같아 죄송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직장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사히 직장을 잘 다니나 했더니, 딸은 갑자기 퇴사를 한다고 했다. 정말 아빠에게는 전혀 일언반구도 알리지 않고 내린 결정이었다. 아빠는 반대하실 틈도 없이 많이 당황스러우셨을 것이다. 퇴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갑작스레 알지도 못하는 머나먼 타국으로 떠나겠다는 딸의 말에 아빠는 두 번 충격을 받으셨다. 아빠는 '보호자 파견 동의서'에 사인을 해 주지 않으셨다. 하지만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


알 수 없는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딸은 아빠에게 상의조차 하지 않았다. 또는 딸이 너무 충동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만 1년 넘게 혼자서 퇴사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놀라우셨을 것이다. 아빠의 생각에는 그저 딸이 평범한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굳이 잔잔한 수면에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불안하셨을 것이다. 아빠는 화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끝내 내게 기억에 남을 만한 응원의 말을 해 주지 못하셨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아빠는 "잘 갔다 오라"고 말씀하셨다. 그 뒤에는 불안한 마음, 안타까운 마음을 꽁꽁 감추고 있으시다는 걸 알았다.



난 착한 딸이 아니다


최근에 아빠께 예전에 나보고 "착한 아이가 아니야"라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냐고 여쭤봤을 때, 놀랍게도 아빠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셨다. 아빠는 대수롭지 않게 홧김에 내뱉은 한낱 수증기처럼 증발하는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아빠의 그 말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놀랍다.


결론적으로 난 착한 딸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 순종적인 딸이었지만, 사실 언제나 부모님의 말을 조용히 거슬러왔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는 건 일상이 되었고, 나는 '항상 걱정스러운 딸'이 된 지 오래다.


지금은 예전처럼 큰 사건이나 사고는 없지만, 여전히 부모님은 내가 모르는 곳에서 노심초사하셨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주 연락을 드리지 않았다. 내가 먼저 안부 전화를 드리지는 못할 망정, 매번 부모님이 전화를 하시게 만들었다. 부모님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기분이 내키는 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몇 주 동안 전화도 없고 답장도 없을 때도 있었다. 부모님가끔 너무 내가 심하게 연락을 받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짜증이 섞인 답답함을 토로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이젠 지친다고 말씀하셨다.


"쫌,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라."


전화 통화의 말미에 이런 말씀을 덧붙이면서, 아빠는 혹여나 내게 기대를 할까 봐 걱정하시는 듯 보였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슬펐던 것은, 그 말씀에 강하게 반박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아빠를 실망시켜드린 적 없다고, 그리고 앞으로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거라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솔직히 말해서 내가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 항상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느낌, 아직 부족한 것만 같은 불안한 한구석이 존재한다. 내 마음은 언제나 비가 온 뒤 아직도 드리운 뭉게구름이 가득한 하늘 같고, 그걸 걷어내려면 앞으로 수많은 밤과 수많은 날이 필요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가 내게 기대를 하고 계실 거란 걸, 다. 아빠는 딸에게 또 실망하시게 될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대를 할 수밖에 없는 불운한 운명을 타고나셨다. 언젠가 아빠는 내리사랑은 숙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하실 때 아빠의 모습은 시지프스가 매일같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가왔다. 그리고 아빠의 큰 딸을 향한 마음은 매번 다시 굴러내려 와 아빠를 아프게 한다.


더 이상 아빠는 이젠 내가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 바라지 않으시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슬픈 풍경이 되었다. 딸에게 더 이상 바랄 수 없고 바라는 게 없다는 아빠의 말씀이야말로 불효를 증명하는 것이다. 아빠가 이때껏 해온 실망을 모두 더한 값의 결과,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포기.


세월로 인해, 그간의 경험들로 인해 아빠가 굴러 올리는 돌은 조금 무뎌지고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아빠는 '우리 딸은 착한 딸'이라는 기대를 들어 올리고 계실 것이다. 그러한 모습을 상상하면서, 내 마음은 손에서 발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어쩌면 아빠 마음에서 그 돌덩이 같은 기대를 걷어낼 수 없다면, 그 마음의 짐을 함께 들어 올리는 것만이야말로 아빠의 운명에 거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빠의 착한 딸은 이제 찾을 수 없지만,
아빠는 숙명처럼 딸에게 기대하고 또 실망을 반복하시죠.
저도 이제 아빠의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매번 실패하지만 노력해 보려고요.
그게 바로 안 착한 딸의 숙명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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